우리의 첫 만남은 도서관이었다. 우리는 도서관 수업을 같이 듣는 사이었다. 수업 내용은 심리 치유 에세이를 같이 읽고 섹션별로 발제를 맡아 발표하고 인간의 심리 기제를 더 깊이 알아 가는 그런 수업이었다. 선생님의 주도 아래 우리는 제법 열정적이었다. 평소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은 나는 나의 유년 시절의 상처가 깊은 흉터가 되어 현재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슬픔으로 자리 잡아 늘 체한 것 같이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나에게 도서관에서 열린 심리 치유 독서 수업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우리는 선생님을 포함하여 총 넷이었는데, 다들 엇비슷한 이유로 모였고, 책과 도서관을 사랑했고, 자신의 마음 상태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각자 발제를 맡아 자신의 부모, 유년 시절, 배우자 등의 내밀한 이야기를 토해 내듯 털어 놓았다. 눈물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면 나는 준비해 놓은 휴지를 꺼내어 말없이 그의 자리에 놓아 주었다. 수업을 시작할 때면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져와 나누어 먹거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수업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우리의 연대는 밧줄처럼 단단해졌고 또 예민한 이야기를 내놓아야 하는 만큼 까칠해지곤 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내 마음에 있는 커다란 흉터가 조금은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였던 부분을 털어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내 말들을 도로 주워 담아오고 싶을 만큼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남녀의 성적 욕망에 대한 섹션을 내가 발제해야 할 때는 실로 막막했다. 성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요점을 정리하고 함께 이야기 나눠야 할 질문들도 정리해야 했고, 과거의 나의 이야기들도 나눠야 하는 자리였기에 무엇보다 걱정이 되었다. 발제문을 정리하면서 남편을 만나기 전 3년 동안 만났던 전 남친과의 상처가 떠올랐다. 그는 나에게 헌신적이었다. 고학생인 나에게 과외를 해 번 돈으로 매번 소고기를 사주며 독려를 해 주었고, 내 학자금을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었다. 그런 그에게는 심한 결벽증이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느꼈지만, 어떤 스킨십도 허락하지 않았다. 3년을 만났지만 손을 잡는 건 외에 우리는 연인 같은 스킨십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연애를 많이 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때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종종 결혼 같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오누이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고, 그에게는 고마움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힘든 시절이었기에 의지했고, 함께해 주어 고마운 점이 많지만 상처가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래전의 일들이었지만 발제문을 정리하며 나는 20년이 지나서야 그와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내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그와 만난 3년이 이후 연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제야 제대로 되돌아볼 수 있었다. 발제문을 쓰면서 밤새 20년 만에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썼다. 눈물이 났다. 그를 다시 한번 보내주는 마음이 들었다. 막상 수업에 들어가니 나와 다른 색깔로 다른 분들은 허심탄회하게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묘한 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번 가까워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수업이 마무리되자 우리는 선생님을 제외한 채 따로 독서 모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주일에 한 번 세미나실이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였다. 장소는 늘 내가 예약해 두었다. 심리에세이를 다루기로 했고, 첫 번째 섹션은 공포였다. 발제자는 공무원을 하다 휴직 중인 50대 여성분이었다. 평생을 일과 아이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헌신한 여성상이었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가족을 보살피느라 애쓴 분이었다. 그녀의 공포는 망상이었다. 그녀는 아주 가끔 망상에 사로잡히는데 자신이 아무 옷도 걸치고 않고 있다는 망상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밖으로 나와 달린다고 했다. 길 한복판에서 막막했다고. 숨도 쉬어지지 않고 부끄러워 죽고만 싶은데, 그 순간 최고의 공포를 느꼈다고 말이다. 실제로 약도 먹고 병원 치료도 받는 그녀였다. 일단 그런 은밀하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힘들었겠다고 우리는 공감해 주었다. 그녀의 그 순간의 공포가 전부는 아니지만 내게도 느껴지는 듯 했다. 그녀는 발제문에 내 인생에서 느꼈던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이었나요? 라는 질문을 넣어 두었다.
그 질문에 답은 나부터 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여고 시절 나는 꽤 지대가 높고 외진 곳에 살았다. 대학가였는데 아랫동네는 번화가였는데 형편이 넉넉지 않아 우리 집은 말하자면 산꼭대기에 위치했다. 시험이 끝난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보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으슥한 골목길의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늘 그 계단이 무서웠다. 인적이 드물고 검은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나타나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번화가에 사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고, 혼자 올라가야 하는 내 처지가 조금 슬펐던 것도 같다. 묵묵히 올라가고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그래도 조금 더 밝고 사람들이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오기에 힘을 내야 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으슥한 공간에 숨어있던 불량배 남학생 무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야, 쟤 잡아 와!” 순간 나는 그 비좁은 골목을 지나 넓은 길로 진입했고 뒤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시팔 놓쳤네.”
다리가 풀렸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겨우 걸음을 재촉해 집에 돌아와 이불을 채 펼치지도 못한 채 이불 더미 옆에 앉아 밤을 새웠던 기억, 고1 초여름이었다. 그때 나의 공포심이란!
지금도 나는 밤에 방문을 꼭 잠그고 잔다. 나의 불안은 어린 시절의 공포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서로를 다독여 주고 같이 울고 웃으며 귤을 까먹었다. 코칭 전문가였던 나머지 한 분의 공포 이야기는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두 달 넘게 매주 수요일 10시 카페에서 만나 3시간을 꼬박 이야기했다. 남편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같이 책을 읽고 서로를 다독이며 시간을 보냈다.
23년 12월 27일 배우 이선균이 생을 마감했다. 그날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우리들의 불안과 심리 기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울며 웃고 있었다. 이선균의 기사가 속보로 올라왔고 갑작스레 생을 마감한 유명 배우의 소식에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설렁탕을 먹으며 시시껄렁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깍두기를 각자의 접시에 덜어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물을 따라 주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이후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을 만큼 먼 사이가 되었지만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어떤 특별한 안부가 되어 서로의 마음에 흐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