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언어대신 감각으로
여행 중의 대화는 여행을 확장시킨다. 나와 당신이 같은 곳에서 느낀 다른 형태의 감정이 이야기를 통해 교류될 때,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은 저 먼 곳까지 이르게 된다. 얄팍한 농담과 잦은 웃음은 세상의 모든 공간과 시간을 한층 더 유쾌하게 꾸며내며.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맞는 동행을 구하는 수고로움을 여행의 필수단계로 여긴다.
어떤 나날의 두터운 공기와 바람의 밀도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흔치 않게 주어진다면, 나는 에든버러에서 처음으로 그 축복스러운 능력을 경험했다. 어쩌면 깨달았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1월의 첫째 주, 영국 교환학생의 마지막 낱알들을 남긴 어느 날이었고, 제각기의 여행을 떠난 친구들의 여백을 메꾸고자 나는 가까운 스코틀랜드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을 준비하며 이따금씩 불안을 틔워낸 것은, 예상치 못한 위험이나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변수에 대한 두려움은 의외로 아니었다. 물론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매 여행 친구들의 도움을 섭섭지 않게 받아 왔던 터라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은, 모든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감탄할 때 배로 애틋해진다고 믿어 온, 그런 방식에 익숙한 나의 습성이었다. 시시각각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없는 이 여행이 내게는 고요함 이상의 아득함을 몰고 올 거라는 걱정이 온 마음을 장악한 채 에든버러로 향했다.
- 이곳은 숙소 근처 에든버러 뉴타운에 위치한 McNaughtan's Bookshop이다. 숙소에 짐을 두자마자 이곳에 들른 건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그곳의 오래된 서점을 찾았던 내 친구들의 흔적을 좇은 것이다. 그들과 함께였을 때처럼 할머니 댁의 쿰쿰한 책장마냥 먼지가 자욱한 그곳을, 그 묵직하게 퇴적된 흔적을 입은 책들을 느긋하게 살펴봤다. 흥분했던 템포를 나의 속도로 맞추기 위한 의식적인 시간이었다.
- 노을의 풍경이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알려진 칼튼 힐에 올랐다. 흐린 날이 대부분인 스코틀랜드에서 일몰이 예쁘다고 이름이 나려면 어떤 곳이어야 할까. 언덕 아래에는 올드타운의 오래된 건물들이 낮게 즐비해 있다. 그 너머에는 북해의 바다가 손끝에 닿을 듯 멀지 않은 곳에서 영국의 어느 지역과도 견줄 수 없는 바람을 일어낸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북적북적한 공간에 가만히 앉아 해가 지기를 바라보는 경험을 많이도 했다만, 널찍한 언덕에서 자유로히 바람을 맞으며 온몸으로 누볐던 이곳이 가장 좋았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막힘이 없던 그곳에서는 에든버러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씩 외로움이 덜어지고 있었다.
- 전시되어진 것들보다도 건물과 공간 자체에 눈길이 갔던 National Museum이다. 원래도 널찍한 박물관을 층층이 돌아다니기를 버거워하던 사람이었으나, 홀로 있으니 포기하는 시점이 한층 빨라졌다. 2층 카페에 앉아 스콘과 티를 먹으며 가만히 사방을 주시했다.
남은 스콘을 포장하려 직원을 불렀을 때, 그는 나의 눈빛만 보고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스콘을 그릇째 가져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오해가 생겼음에 틀림없었지만 굳이 정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친구들에게 들려줄 재미나고 어이없는 에피소드가 하나 늘어났음에 신이 났을 뿐이다.
- 에든버러 성이 보이는 Princess Street Garden, 그것을 둘러싸고 이어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거리, 오래된 영국의 고전 소설을 상상케 하는 Dean Village와 해리포터의 배경이 된 빅토리아 스트릿을 따라 걷기를 반복했다. 걷는 것이 일상이 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작고 적당했던 에든버러의 규모 덕분에 결코 무력해질 틈이 없었다. 이따금씩은 이어폰을 빼기도 했는데, 노래를 듣지 않고 거니는 게 얼마나 생소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 소을은 너무 고립된 듯한 느낌이 들 때면 주위의 소음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할머니들의 수다 소리를 듣다 보면 그곳에 속한 느낌이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 나는 그 반대였다. 이어폰을 빼자 들리는 언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흘려 넘기기 쉬운 외국어뿐이었고,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나는 외롭지 않은 그 고독을 오히려 느끼고 싶었다. 온전한 타인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완전한 외국인으로 그곳을 여행하고 싶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했을 법한 여행의 순간들을 오롯이 홀로 채우며 많은 말을 속으로 삭였다. 그러는 동안 내 안은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처럼 마구잡이의 무의식들로 채워졌다. 내 생각이 이토록 자유롭게 횡단할 수 있다는 데에 놀라며, 복잡한 감정의 흐름들이 이 낯선 시공을 마음껏 방랑하도록 두었다.
생각은, 감정은, 감각은 보다 단순하지 않다. 날씨를 보고 찬탄하다가도 지나가는 사람들에 시선을 빼앗기며 낯선 도시를 혼자 사색하는 비현실이 감동스럽다가도 놓고 온 현실의 고민들이 불쑥 찾아든다. 수만 가지의 고민과 깨달음과 영감이 뒤섞이며 내 안은 이미 시끌벅적하다.
과거의 여행이 떠오른다. 미술관에서 맘에 드는 작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물어온다. '어때?' 그때 나는 찰나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말을 뱉는다. '좋아!' 그리고 가만히 생각한다. 그건 단지 좋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었나. 먼 훗날 뒤 돌아보면 결국 그 순간은 그저 '좋았던 순간'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이면의 축제처럼 시끄러웠던 생각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떤 순간을 빛내주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어떤 순간은 쉬이 언어로 형용할 수 없기도 하다. 잠시 언어를 포기할 때, 생각은 온갖 곳을 누비며 그 순간을 감각한다. 떠오르는 사고들을, 표류하는 감정들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내 모자란 언어들이 아쉽다. 때로는 말로 가꾸어지는 생각도 있는 법이지만, 이 여행에서 내게 펼쳐진 외, 내적인 풍경은 결코 어떤 말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경솔한 언어를 통해 에든버러에서 겪은 감정들이 휘발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기간의 감정과 이 깨달음마저도 글로 기록해야 했다. 양떼구름처럼 끝도 없이 나열된 생각들은 고르고 골라낸 단어 하나로 써내려 지는 그 순간에도 반쯤 날아가버린다. 그렇기에 이 글은 여행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결코 완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에든버러에서의 4일을 이렇게 남길 수 있는 건, 그 시간을 이토록 구체화하여 기억할 수 있는 건 그날을 그리워할 현재의 나를 위해, 일순간의 행복에서 잠시 벗어나 신중한 마음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생각하고 쓰는 여행을 부단히 이어갈 예정이다. 마침내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