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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joo Feb 20. 2024

폐지처럼 쥐어짜이는 인간의 말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p-16)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확신했다. 한탸의 삶은 내가 이상적이라 여겨 온 삶의 정점이라는 것을. 고단하고 처연한 현실에서 벗어나 언제든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공간. 나의 삶을 초월해 무한한 제3의 삶과 시선으로 이입할 수 있는 정신적 기지를 지니는 것. 그것이 내가 책으로부터 늘 기대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 문장의 끝에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하나의 단어를 나는 지나치고 있었다. 바로 그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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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탸는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캄캄한 지하 작업실로 흘러 들어오는 각지각색의 종이들, 그는 그것들을 압축기에 넣어 한낱 종이 꾸러미로 만드는 그런 작업을 하며 살아간다. 니체, 헤겔, 노자, 실러의 깨달음이 담긴, 그리하여 한때는 인류의 존재를 지탱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책들은 그의 손을 거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그저 물질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하등 무용한 종이 더미의 운명에 열과 성을 다해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한탸였다. 한탸는 사라지고 말 활자들의 마지막 생명까지도 모조리 흡수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의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는 삼십오 년 동안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으며 살아왔다.  


그의 삶은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와도 같다. 반복적인 행위의 연속. 그의 삶은 고된 노동이라는 한 줄기로 이어져있다. 하지만 한탸에게는 그 반복적인 노동의 무력함을 상쇄시키는 나름의 낭만이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그의 내면에 무한히 확장해 온 철학과 교양의 세계였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영감을 준 훌륭한 사상가들의 흔적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굉장한 무언가로, 단지 종이 쪼가리가 아닌 그 이상의 어떤 작품으로 재탄생될 거라 믿는 몽상가였다. 마침내 은퇴한 후엔, 그가 사랑하는 압축기를 집 안에 들여놓고 그간의 종이 꾸러미들을 놀라운 값어치로 내놓을 거라 기대하며 그가 남겨놓은 일말의 여지는 바스러진 그의 삶에 미광과도 같은 '작은 불꽃'을 틔워놓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항상 되뇌었으니.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책으로 담을 쌓고 고요하게 지켜 낸 그의 삶에 여전히 부재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그는 유일하게 그가 인간적이었던 그때를 회상한다. 그에게는 타오르는 불꽃 자체였던 집시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이유도 없이 설명도 없이 찾아온 그녀였지만 그들은 함께 누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순간의 안전성을 만끽했다. 그의 마음 안에 난롯불 하나를 지피며 행복의 숨결을 불어넣은 그녀는 그렇게 일렁거리는 한 줌의 불빛처럼, 떠도는 하늘의 연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그때부터였을까. 불빛은 그의 안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갔고, 현재는 책만이 그에게 한줄기의 불꽃을, 영원한 야등을 밝혀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절망은 그가 믿었던 모든 세계가 무너지며 찾아왔다. 자신의 압축기와는 견줄 수도 없는 거대 압축기를, 엄청난 양의 폐지를 그저 토해내듯 짓누르는 압축기 아래에서 건조한 얼굴로 일과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젊은 노동자들을 마주한 그는 상당한 허탈감을 느낀다. 결국 압축기에 몸을 바치고 책과 함께 쓸려나가며 그는 생을 마친다. 고루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그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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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탸를 고집스러운 외골수라고 동정할 수 있을까. 과연 젊은 노동자들을 무정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닌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한탸에게는 두 명의 친구가 존재했으니, 그건 바로 예수와 노자였다. 둘은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미래로의 전진이라면, 노자는 근원으로의 후퇴었다.' 나는 한탸의 과거에서 예수를, 현재에서 노자를 보았다. 그 자체로 활활 타올랐으며 지극히 인간적인 것(책에서는 똥으로 치환되는)에 매달리고, 사랑에 절망하던 과거의 한탸는 이제 모든 경험을 한 발치 떨어져 철학과 지혜로 관망하는 현재에 이르렀다. 예수와 노자는 인간 안에 공존하고 있으며, 이제 현실 속에서 자신은 결코 예수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태우고 나면 결국 인과 철로 남을 뿐인 인간의 존재, 책과 다를 바 없는 운명을 통감한 한탸였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떠나간 집시 여인의 이름을, 그 따뜻한 안온을 마지막으로 떠올릴 수 있던 건 무엇 때문일까. 그는 압축된 폐지들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하기를 기도했듯, 자신에게도 죽음 후에 새로운 생명력이 주어지길 소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근원으로의 후퇴는 근원으로의 전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이 한사코 고루하지만은 않다.


하늘은 모순적이고, 결코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한 고독과 허구, 완전한 현실 중 그 무엇이 정답이 아니듯, 파괴에 접어들 때 비로소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듯. 상반된 가치가 무수히 사라지고 생겨나는 세상에서 인간은 조화와 균형을 찾기 위해 평생 고민해야만 하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한탸처럼 치열한 내면의 고독으로 한없이 쥐어짜이고 싶다. 그렇게 나의 꾸러미들에도 의미가 생기겠지.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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