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이 Mar 06. 2024

영어는 언어가 아니라

8. 바닥돌 바꾸기-스타트 잉글리시Start English

쉬워 보이는 것을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쉽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 알고 활용하도록 만들기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어렵다. 모두가 나름대로 영어를 통과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아직도 ‘먼 그대’인 영어. 조금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영어. 실제 사용할 수는 더욱 없는 영어. 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결코 잊지 못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어떻게 다시 첫발을 떼고 어떤 식으로 그것과 함께 갈 것인가. 어느 부분을 얼만큼 알고 모르는지 가늠하기 힘든 추상물 영어를 구체화시키는 일. 골치 아픈 작업이다.  

    

작년에 케일린이 진행을 맡게 된 스타트 잉글리시Start English 왕초보자를 위한 좋은 강좌라고 생각했다. 영어를 떠나 있었으나 그리워진 이들을 공부로 불러주는 간소한 차림새의 밥상같은. 한 음절씩 천천히 맛보듯 이어지는 서너 마디의 영어. 꼭꼭 씹는 맛을 느끼며 끼니마다 밥상을 받게 하려면 진행자의 자신감과 인내와 믿음이 절대 필요하다. 처음에 케일린은 힘들어 보였고 20분이 길었다. 짧은 문장 몇 개로 그의 좋은 발음이 빛날 기회는 그다지 없지만 우리말 사용은 많고 정확해야 하므로 부담이 클 수 있는 강의다. 게다가 진행에 도움이 되는가 싶었던 알렉스는 몇 달 뒤 본국으로 돌아갔고 뒤를 이은 제크는 아직... 힘내라, 케일린. 


그런데 케일린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듣다 보니 오모나! 왕초보용이 아니다. 나처럼 기본이 엉성한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거다. 변화된 규칙과 용법들을 비롯하여 발음도 완전 기초부터 점검하는 시간. ‘내 영어’의 바닥돌과 허술한 벽돌을 허물고 바꾸며 다시 쌓도록 돕는다. 제크도 곧 그 좋은 목소리로 케일린을 척척 도울 것이다. 주치나 세리나처럼. 지금 케일린은 여유롭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중. 서두름 없이 또박또박 안정감 있게. 진짜 시~작~! 케일린 화이팅!     


나는 영어느림보다.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로 종종 영어를 잡아채지만 금방 잊는다. 간직하지 못한다. 다가오는 그것들을 조용히 맞이하거나 덥석 안지만 내 영어의 방에 쌓이는 것은 없다. 종종 깊고 강렬히 들이닥치는 것들도 어느새 빠져나간다. 물보라와 안개 속에 아련·알알한 정동들을 남길 뿐. 따스하지만 섧은, 안타까움과 그리움. 전해지기도 전에 번지며 찢기는 편지, 또렷했던 문자는 분해되고 허연 조각들만 나풀나풀. 내 영어의 그물망은 낡고 찢겨 구멍이 숭숭.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물코를 연결할지 모른다. 엉킨 그물을 풀어낼 길이 없다. 나는 언어의 기둥을 잘 세우지 못했다. 내게 영어는 혼란과 혼돈이다. 언어가 아니라 감정과 감각들, 몰려오는 정서 그리고 무게다.

  

아마도... 유년시절 3년 동안 삶과 죽음을 오가던 내 몸 주변을 채웠던 '낯선 소리·소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의료진의 언어. 가난했던 한국에 병원을 세우고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했던 카톨릭 메리놀외방선교회, 미국·영국인 의사와 간호사 수녀님들. 나를 살린 사람들의 언어. 무수한 고비를 넘기는 아이의 주변에 다급히 흐르는 소리들. 어린 몸을 자극하고 사라졌을 어떤 울림, 박동, 마음들과 걱정들. 의무감과 책임감과 인간애, 헌신, 기도, 사랑... 어린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나에게로 실어나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어떤 가락-흐름. 영어는 전부이자 아무것도 아닌 혼돈, 그리고 모호성 자체. 결코 어떤 필요로 선택하고 배우는 도구일 수 없었다, 영어는 내게.     

 

섬뜩한 이물질인 동시에 친밀한 타자였던uncanny 영어. 인생의 꼭두새벽부터 아이가 제 목숨을 붙들기 위해 간절함 속에 귀를 통과시켰던 청각이자 촉각이었던 그것. 그리고 삶의 암시, 신호, 약속의 빛. 삶이자 죽음인 영어. 그 영어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살았음을 의미한다. 내 등뼈가 드디어 붙고 동체에서 마침내 깁스를 벗어던졌다는 것. 당연히 내게 영어는 삶을 향한 동시에 죽음일 수도 있는 언어덩어리로 몸에 새겨졌을 터이다. 내 영어 역사의 몸서리치는 양면성. 근원적 감사 속에 몹시도 그립지만 부인해야 하는 언어.


그래서일까, 영어를 발음하는 일이 즐겁고 읽기를 좋아하면서도 멀리 두고 싶었던 이유. 한편 나-지진아는 세익스피어를 포함하여 고전명작들을 영어로 다시 읽으며 늙어갈 거라고 생각해 왔으니, 영화 <About Time>의 아버지처럼. 맘대로 뛰어놀 수 없었던 내 유년시절 삼년 동안 특이한 방식으로 내 손을 잡아준 영어... 오래오래 조금씩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며 이미 평생을 함께 가고 있는 친구였음을 전혀 몰랐네. 죽음까지 포함한 삶의 길, 생의 종終이자 완完인 죽음으로 함께 놀며 걷는 친구. 아이고 이것 참!          

작가의 이전글 술비발(Survival)의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