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한입

by 빛나는복도

오래간만에 정신을 차리고 출근길에 책을 읽었다.
지하철에서 무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계속되다 보니, 머릿속이 답답해졌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늘 그럴듯한 이유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직장생활이 바쁘기 때문이라는 핑계였다.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 일을 시작하면, 어느새 시계의 숫자는 크게 넘어가 있다.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만큼 피로도 함께 쌓였을 것이다. 그렇게 퇴근길 지하철에 오르면 스스로에게 작은 보상을 허락하고 싶어진다. 핸드폰을 꺼내 숏츠를 넘기며, 이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보상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싶었던 것 같다. 숏츠는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화면을 위로 밀면 다음 영상이 자동으로 올라온다. 알맹이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고, 이미 본 이야기들이 편집과 음악만 바꿔 반복된다. 그렇게 같은 내용을 다른 포장으로 돌려보며 뇌를 태운다.


숏츠를 보고 나면 개운하지 않다.
무언가가 또렷해지기보다는 흐리멍텅해진다. 이게 중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멈추지는 못했다.


내가 숏츠를 멈춘 순간은 뜻밖에도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였다.


퇴근길 지하철에 앉아 핸드폰 화면을 무의식적으로 넘기고 있던 때였다. 그때 한 중년의 직장인이 내 앞에 섰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여전히 흔치 않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습관처럼 책 표지를 본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고민이나 생활이 얼핏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 그 남자는 미래나 노후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닫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머리에서 멀미가 나는 느낌이었다. 자꾸 화면만 들여다보는 생활에 물렸다고 해야 할까. 일주일 내내 빵만 먹은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느끼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김치 한 입이 필요한 상태였다.


나는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책을 꺼냈다.
집을 나설 때마다 ‘오늘은 꼭 읽어야지’ 하고 책을 넣어두지만, 요즘은 늘 패배한 채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날은 달랐다. 남은 퇴근 시간 동안 책장을 넘겼다.


그래, 이 느낌이었다.


소설 속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감각. 어느 순간 지하철은 사라지고, 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영상과는 확실히 달랐다. 글자가 만들어내는 풍경과 시대는 모두 내가 상상하는 대로 펼쳐졌다. 주인공과 어머니가 눈 덮인 산길을 걷고 있으면, 내 머릿속에는 이미 그들의 얼굴과 체온, 발밑에서 부서지는 눈소리가 떠올랐다.


글은 나의 머리를 쓰게 만들었다.
오래간만에 문장을 따라가며 생각을 하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빵만 먹던 뇌가 드디어 김치 한 입을 얻어먹은 기분이었다.


이 상태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영상이 주는 중독은 분명 강력하다.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다. 다만 숏츠에 충분히 빠지고 나서야, 책이 주는 힘 역시 그만큼 강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불현듯 나타나 내 뇌에 주름 하나를 만들어준, 이름도 모르는 그 중년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평생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서 동기를 얻다니. 그는 내가 그날 책을 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까.


나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그런 영향을 준 적이 있을까.
없어도 괜찮다. 사실은, 별로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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