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거의 유일한 도피다.
그날도 어김없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역사 이야기가 나왔다.
나름 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선택이었다. 거의 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아는 척을 하려 해도 뽐낼 만한 지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 가치 있으려면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는 걸까. 다 까먹었다면, 그 시간은 의미가 사라진 걸까.
역사를 왜 배워야 할까.
역사는 인간이 지나온 흔적을 사실대로 남긴 기록이라고들 한다. 기록의 역사니, 사실의 역사니 하는 구분도 있다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책과 영상은 정말 많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거나, 선조들의 지혜를 본받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거나.
그런데 정말 역사를 삶에 적용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군대에 있을 때 설민석은 유난히 유명했다.
텔레비전에서 펼쳐지는 그의 강의는 연극처럼 생생했고, 역사는 마치 잘 만든 전래동화처럼 느껴졌다. 재미있었다. 동시에, 역사를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고 창피하게 느껴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전역 후, 본격적으로 역사를 공부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을 준비했다. 취업을 위해서도, 의무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기왕이면 시험도 보고, 자격증도 있으면 좋지 않겠나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역사를 배우며 신기했던 건, 그 시대만의 상황과 체계였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때로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붕당정치나 무신정변 같은 이야기들은 근현대사와도 맞닿아 있었다. 역사는 정말 돌고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그래서 내가 역사를 배워서 뭘 하지?
역사를 몰라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렸다. 역사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말도,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말도 흔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를 새로 만들어가며 살고 있다. 나는 고민이 생길 때마다 역사서를 펼쳐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지혜를 빌려 결정을 내린 적도 없다. 그저 혼자 고민하고, 혼자 빠져나올 뿐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정말 필요 없는 걸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몰라도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할지는 몰라도, 삶은 굴러간다. 다만 역사를 통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얻을 수 있다.
요즘 인문학이 유행한다.
교보문고에 가보면 ‘꼭 읽어야 할 인문학 책’이라는 문구가 유난히 많다. 그만큼 사람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가 인간을 잘 모르고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라고 한다.
우리는 역사를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을 모른 채로 사회를 살아가기는 어렵다. 친구를 만나고, 직장 생활을 하고, 부부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대기업 회장들 가운데 인문학 전공자가 많은 것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을 알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인문학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한다. 다만 역사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판단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곱씹다 보면 생각이 끝이 없어진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꼭 역사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만나며 배울 수도 있고, 다른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역사는 그중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역사를 배우며 알게 된 또 하나는, 인문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 역사에 빠졌을 때, 대학을 휴학하고 역사적인 장소들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교과서 속 유물과 유적을 실제로 보고 싶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실행력이 대단했다.
그때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찾았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는데, 시간이 남아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단종을 ‘단종대왕’이라고 불렀다. 대왕이라는 칭호는 세종처럼 큰 업적을 남긴 왕에게 붙는 것이라고 배워왔던 나는, 어린 나이에 업적도 없이 쫓겨난 왕에게 대왕이라니,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청령포에 들어가 유배지를 돌아보고, 단종을 기리는 공간에 다다르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의 외로움과 고독이 공간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를 대왕이라 부르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사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건 결국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뭣도 모르고 역사를 배워서 다행이다.
취업을 위해 공부했다면, 역사는 그냥 시험 과목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역사를 인간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실은 대부분 까먹었지만, 대신 내 안에는 아주 작게나마 인문학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지하철 퇴근길,
스마트폰으로 끄적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