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남편에게 체크아웃을 확실히 하라고 서너 차례 말했을 뿐이다. 두 아이를 데리고 풀빌라에서 하룻밤 실컷 놀고 퇴실하여 나오는 길이었다. 사무실이 곁에 없고 연락을 해야 어딘가에서 직원이 오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체크아웃 시간보다 일찍 나가는데 문단속도 제대로 안 하고 그냥 갔다가는 혹시라도 무슨 불상사가 생겼을 때 우리 책임이 될 것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내게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TV 프로그램에서 봤다면서, 어떤 직장맘이 직장에서도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고 그 성향을 아이들에게 보여서 ‘오은영’에게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이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엄마의 그런 성향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엄마를 좋아했고 엄마도 아이들을 좋아했는데 괴롭히고 있는 줄 몰라서 상담을 받고 나서 서로 울면서 화해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그의 입을 서둘러 막아버렸다. 뒷말을 들어봐야 내게 더 상처 주는 – 아니, 확실히 상처 주는 말일 것이다.
“완벽주의라고? 왜 엄마들에게만 그런 말을 붙이는 거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며? 완벽주의란 건 자기 기준이 분명히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면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뜻이고. 멀쩡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면 강박증은 아니란 얘기잖아. 게다가 아이들이 엄마를 좋아한다며? 대체 그 집은 뭐가 문제라고 방송에 제보까지 한 거지? 아이들에게는 직장 생활과 다른 모습을 보이란 건데, 어째서 여자들에게만 그런 기준이 적용되는 건데? 그건 이중 기준 아닌가? 아빠들에게도 그런 기준을 적용하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정신병 환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냐?”
남편은 아니라고, 자기는 남자든 여자든 같은 기준이 통하지만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게 여자라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나는 안다. 그건 그의 진심이 아니라 내게 비난받지 않으려고 둘러대는 임기응변이다. 그에게는 반페미니스트나 성차별주의자가 되기 싫은 마음이 있다. 나와의 십 년 넘는 결혼생활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한국 사회에서 꽤 괜찮은 축에 속하는 남자인지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엄격하고, 통제력이 강한 여자에 대한 혐오는 유독 여성에게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내가 풀빌라의 체크아웃을 확실히 하라고 한 것만으로 완벽주의자 성향이라는 판단 굴레를 덮어쓰듯이 어딘가에서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교묘한 이중기준들이 여자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부족해. 너는 하나를 성취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허점들이 생기고 있어. 그건 아주 큰 허점이지. 왜냐하면 그 훼손되고 있는 게 너의 ‘여성성’이니까. 관대하고 다정하고 보살핌에 특화된 자질들 말이야. 참고 인내하고 타인을 수용하고 타인의 관점을 인정하고 타인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 성향 말이야. 그런 걸 버리면 안 되지. 그건 여자라면 꼭 있어야 할 ‘필수 요소’니까.
이십 대까지는 나도 그런 사회적 압력들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는데 그런 성향이 나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항상 좌절하도록 만들어 왔다. 어느 분야든지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 뭔가를 성취하려면 물고 늘어지는 성향이 있어야 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게 부하직원이든 물질적인 일의 결과물이든 사고과정이라는 추상적 결과물이든지 말이다. 여성들에게는 그 과정에서 ‘너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 집중하라는 압력이 계속 들어온다. 너 지금 네 생각에만 너무 빠진 거 아니야? 통제력을 좀 줄여봐. 느슨하고 관대해져 보라고. 왜냐고? ‘우리가 너를 대하기 불편하잖아.’
남성들에게도 관계 지향적인 태도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 하는 만큼은 아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그랬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태도를 요구받고 있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 순응하며 살았다. 마치 강화실의 「음복」에 등장하는 여자들처럼. 그 덕분에 미소를 조절하고 경청하고 맞장구를 치고 상대를 높이는 칭찬 같은 기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렇다. 20년을 온갖 직종의 경력 단절로만 점철시킨 두 아이의 엄마고 한 남자의 아내이며 며느리이고 딸이다. 그리고 재취업을 시도할 때마다 무시당하고 모멸감을 느끼고 때로는 성희롱도 당하고 성추행도 당했다.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눈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은 한결같았다. ‘약자네.’
『김지은입니다』를 읽다가 화가 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당신 왜 이렇게 바보 같아. 꼭 내 모습 같잖아. 꼭 우리 모습 같잖아. 김지은처럼 그 나이에 그런 어마어마한 권력을 만나서 그런 함정 놓인 길 위를 걷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 운의 대부분은 스물한 살에 만난 남자가 드물게 괜찮고, 적당히 무구영 같았으며, 이십 년 동안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 들어있다. 그러니 그 남자에게 내가 모르는 검은 구멍이 생긴다면 혹은 생기고 있다면 혹은 생겼다면, 나는 한때의 김지은만큼이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이십 대와 삼십 대인 여자들은 속지 말아야 한다. 완벽주의자가 되는 게 낫다. 당신들은 그걸 즐겨야 한다. 만약에 상사가, 거래처가, 동료 직원이 당신의 일솜씨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너무 ‘완벽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과 관계를 멀리 해야 한다. 어쩌면 그게 당신 남편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멀리하긴 힘들겠지. 대신 당신은 남편에게 말해야 한다. 받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보여 달라고. 내가 너무 완벽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먼저 아이들에게 그렇지 않은 부모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아니라면, 당신도 그런 모습에 대해 잘 모르면서, 해낼 자신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냥 아이들에게 ‘엄마는 완벽하다’고 말해주라고. 그 정도면 완벽한 직장인이고 엄마니까 존경하면 된다고 말하라고. 어느 누구든지 결점이 전혀 없는 인간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그건 자기 아내를 ‘너무 완벽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그 자신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고 찬찬히 돌아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