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움에 대한 찬양

살고 쓰다

by 서애라

- 생활과 쓰기에 대한 에세이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있다.

차를 몰고 멀리 나갈 일이 없으니 가스 사용량이 급격히 줄었다. 가스 잔량 표시등이 너무 느리게 꺼져서 이따금 계기판이 고장 난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데이터 사용량도 급격히 줄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해 왕복 2시간 거리의 통학을 할 때는 데이터가 모자라서 늘 허덕였다. 졸지 않으려고 팟빵이든 오디오북이든 뭐든 켜놓아야 했다. 무제한 요금을 사용 중인 남편이 4기가바이트씩 매달 선물을 해줘도 금방 다 쓰고 아껴둔 쿠폰으로 데이터를 충전하곤 했다. 지금은 저렴하디 저렴한 내 요금제의 기본 데이터도 다 못 쓰고 달을 넘기곤 한다.

이런 삶이 싫은가?

아니, 그렇지 않다. 평온하다. 아등바등 돈을 벌고 학교를 다닐 때에는 조금만 단조로운 일상이 닥쳐도 불안해지곤 했다. 내가 정체되어 있는 건 아닐까, 다들 나를 지나쳐서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조금 더 단조로워져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어야 하는 책, 읽을 책, 읽고 싶은 책들이 산적해 있고, 써야 할 글, 쓸 글, 쓰고 싶은 글들도 너무 많다. 걸어서 5분 거리인 도서관에 더 자주 가고 싶다. 거기 가서 책장을 들추면 단조로운 삶 따위는 잊게 된다. 이세계로 가는 포탈이 열리는 기분이다.

예전에도 도서관 성애자이긴 했다. 밀양에 살 때는 걸어서 15분 거리인 도서관으로 에코백을 메고 나들이 가는 게 주말의 일과이자 취미였다. 그러나 대학 이후의 삶에서 지금처럼 도서관 나들이를 죄책감 없이 하는 날들은 없었다. 매번 쫓기는 듯한 마음이 있었다. 도서관만이 나의 안식처라는 마음 한쪽에는 달팽이처럼 껍데기 속으로 숨고 있다는 비참함이 공존하곤 했다. 아무 무기도 없는 사람이라 도서관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서 삶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국외자라는 기분과 자격지심 같은 게 들면 도서관으로 숨었다. 책은 이상한 존재다. 다들 등을 보이고 있는데, 하나같이 포용력이 좋다. 나를 뽑아 달라고, 뽑아서 펼쳐 달라고 등으로 말하는 존재들이다. 뽑아서 펼치면 우리 둘만 있자고, 저 구석진 자리로 가서 숨어 있자고, 소매를 붙들고 속삭이는 존재이다.

책 속으로 숨게 되는 것은 그런 심리였다. 사회에서 내쳐진 못난 사람들이 제 연인의 품속에서 시간을 잊듯이, 잊었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도망친다는 죄책감마저 잠깐 잊었다.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내가 스스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 읽고 쓰는 인간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지금은 쫓기다가 도망치는 기분이 아니라 당연한 일상이라는 듯이 도서관에 간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쓰고 읽는 삶이 해탈의 경지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 있겠나. 불안한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불안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오는 게 아니라 밸런스를 놓칠까봐 생기는 것이다. 내 삶에는 가족이 있으니 그들과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추가 한쪽으로 조금만 더 기울어도 어긋난 경첩에서 나는 듯한 쇳소리가 들린다. 그 때문에 불안해진다. 나 좋자고 한없이 느리고 단조롭게 살 수도 없는 셈이다.

그래도 좋다. 데이터 사용량과 가스 사용량이 극히 미미한 삶. 아이의 등하교 시간에만 외출하는 삶. 장바구니를 돌돌돌 끌고 아파트 상가의 작은 마트에 가서 최소한의 것을 소비하는 삶. 이런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느리고 단조로운 리듬으로 산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만 살면 고립되려나? 읽고 쓰는 인간이 여기도 하나 있다고 종종 알리면서 살아야 하는 거겠지?

그래서 이 글을 썼다. 단조로움 사이에 이세계로 향하는 포탈을 하나 두는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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