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은 어디에서 오는가

살고 쓰다

by 서애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휴식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이 휴식일 텐데 따로 휴식이 왜 필요하냐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벌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을 볼 때 느끼는 것들이 그 한 마디에 녹아 있었다. 동경, 선망, 질투, 억울함, 박탈감, 대상화, 이상화, 기타 등등. 뒤엉킨 그 감정들이 타인의 삶에 대한 오해를 만들고 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말은 나를 겨냥한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솔직히 나는 좀 뜨끔했다. '청탁 없다고 작가가 아닌 것도 아니니 쉬지 말고 써야겠군.' 그러나 다음 순간에 든 생각은 '어, 잠깐, 이게 아니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왜 죄책감을 가져야 하지? 내가 하고 싶은 일 한다고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반 평균 깎아 먹는 하위권 학생처럼 주눅들 건 없잖아.'


반 평균 깎아 먹는 학생이라니. 내 머릿속이지만 참으로 이상한 사고이다. 나만 그런가? 대한민국 사람들은 나이가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어도 반 평균을 생각하는 학생들이다. 어째서 이런 사고방식이 생겨났을까?


우리 사회는 ‘미래를 통제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욕망이 미래를 점점 더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 땅에서 자신의 2세를 남겨두려는 사람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 2세를 낳았던 낙관주의자들조차 “낳고 보니 속았다는 걸 알았다”면서 더 낳는 일을 포기한다. 아이들을 경쟁 속으로 내몰고 어른들의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 (글 아래에 참고 영상 있음)


JTBC에 출연한 인구정책 전문가가 한 말 중에 인상 깊은 것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별 이상한 것을 다 계획한다는 것이다. 언제 취직하고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아이를 낳겠냐고 자꾸 묻는데, 취직은 그렇다 치자, 결혼과 출산을 왜 계획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하면 황당해서 웃는단다. 종교와 관습으로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그런 것은 계획하는 게 아니라 그저 순응하는 거라서 웃을 테고,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유주의 국가에서조차 그런 것을 계획한다는 발상 자체가 웃겨서 웃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 만날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두 사람이 함께 꾸릴 삶이 어떨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 걸 계획할 수 있다고? 우리나라가 16세면 강제 결혼을 시키는 조혼 부족 국가도 아니고, 대체 어째서 개인들이 그런 것까지 계획하며 사는 것일까?


계획하는 습관에 대해서라면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로서도 할 말이 많다.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라면 방학이 닥칠 때마다 방학 계획표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 아이에게 계획표를 작성하게 했다. 내가 받은 학교 교육의 관성이었지만, 아이들 학교에서 선생님이 방학 숙제로 내주시기도 했다.


내가 아이에게 시킨 것은 대략 3가지이다. 방학 내내 할 일, 하루 일과표, 주간 계획표가 그것이다. 방학 동안 하면 좋을 일들을 'To do list'로 간단히 작성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일 같다. 학원에 가는 날과 안 가는 날이 있으니 주간 계획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요일을 착각하지 않고 미술학원에 가게 해줄 테니까. 그런데 하루 계획표에는 이제 의심이 생겼다.


동그란 하루 계획표 속에는 잠자는 시간, 먹는 시간, 쉬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다. ‘자, 쉬어 보자.’ 하고 쉬는 것은 쉼인가? 배도 고프지 않은데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일과 잠이 오지 않는 날에 억지로 침대에 들어가 누워 있는 것에도 회의감이 들지만, ‘쉬는 시간’만큼 물음표가 생기지는 않았다. 루틴이 있는 생활도 좋지만 쉼은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이 증폭된 결정적 계기는 금요일에 영화를 예매했다가 날려 버린 사건이었다. 무료 예매권이 생겼고, 그걸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보고 싶은 영화는 하나도 없지만 영화관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으면 그게 ‘쉼’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취향도 아닌 영화를 예매했다. 표가 하나뿐이라 아이들 없는 시간에 갔다 와야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잊었다. 예매시간도 예매사실도 하얗게 잊어 버렸다.


그 시간에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새로 생긴 스케줄 때문에 헐떡대고 있었나? 아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도서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왔다. 끝.


계획대로라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도서관에 갔다가, 영화관에 갔다가 아이들을 데려와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이 엉터리 계획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일), 도서관에 갔다가(일), 영화관에 갔다가(쉼), 아이들을 데려와(일) 점심을 먹는다(식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실체는 이러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일), 도서관에 갔다가(일∪쉼), 영화관에 갔다가(a|일>+b|쉼>), 아이들을 데려와(일), 점심을 먹는다(식사).


영화관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일인지 쉼인지 관람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중첩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일과 쉼의 합집합인 도서관 나들이는 콩 고르기 같은 일/쉼 교차 작업 행위에서 ‘쉼’의 지분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 결과, 다음 쉼은 필요 없으리라 판단한 내 무의식이 집에 가서 밥이나 먹으라고 명령한 모양이다. 내 무의식은 표값보다는 시간의 효율적 이용을 더 고려하는 모양이다.


내가 영화표를 날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영화 보기를 전적으로 일로 만들어야 했다. 친구(가족)와 약속을 하고 영화를 고르고 그날의 일정을 빼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가야 했다. 일도 설렐 수 있다. 어거지로 하는 일만 일은 아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평생 해야 할 일은 하면서 즐거워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므로 즐거움과 쉼은 등치관계가 아니다.


내가 글쓰기를 아무리 즐겁게 한다고 글 쓰는 일 사이에 쉼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여행은 쉼이 아니고, 자기 계발용 재충전의 시간도 쉼이 아니다. 그건 쉼이 아니다. 계획적으로 쉬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쉼이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이제 쉬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는다면 그게 쉼이고, ‘이제 쉬어야지’ 하고 러닝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달린다면 그게 쉼이다. ‘아, 어깨가 너무 아프니 매일 운동을 해야겠다. 그래야 수술대에 엎드려 디스크를 인공으로 심지 않을 것 같아.’ 하고 러닝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달리면 그건 일인 것이다. 쉼이란 본질적으로 계획 가능한 것이 아니다.


쉬는 시간 없이 계획표를 뻬곡히 메우는 것도 미친 짓이지만, 쉬는 시간을 따로 정해주는 것도 미친 짓이다. 다 같이 공부하고 다 같이 쉬는(사실은 다음 수업을 위한 준비 시간이지만) 학교생활에서 우리는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계획되지 않는 것까지 통제하려는 욕망은 공동체를 삭막하게 만든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국가든 따뜻하고 여유롭게,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획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계획하지 말자. 아이들에게 계획 좀 하고 살라고 하지 말자. 나 스스로에게도 그런 건 묻지 말자.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고, 잉여 자본을 더 많이 축적하라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여건이 주어진다면 언젠가’로 미루지 않는 것. 개인의 삶에서 우리가 계획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일 것이다. 그것마저 계획이 아니라 마음가짐일 뿐이라고 한다면, 뭐, 그래, 계획이란 걸 군사독재 시대에 묻어 버리자. 역사책에서나 보는 걸로.


<참고 기사>

'인구 감소 위기' 해법은?…"둘째 낳는 사회 만드는 게 더 효과적"|뉴스룸 뒤 (D)

http://mnews.jtbc.co.kr/News/Article.aspx?news_id=NB12115731

외신도 꼬집은 '일중독'…"한국 노동시간, 출산율에 영향"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19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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