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501947#home
https://gizmodo.com/chatgpt-ai-water-185000-gallons-training-nuclear-1850324249
AI 생성기로 대충 생산한 엄청난 양의 SF 소설들이 클락스월드에 폭탄 투고된 적이 있었다. 양으로 때려 박아서 그 중에 하나라도 걸리면 상금을 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다수의 (지극히 평범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 저지른 파국이다.
사람들은 방금 나온 따근따근한 기술로 쉽게 돈을 벌어들일 궁리만 한다. 내가 더 빠르고 더 쉽게 생산한 생산물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서 다른 쪽에 공급 과잉을 일으키고, 자신이 일으킬 시장 교란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 채로 초기 생산자로서의 이득만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술만 내놓으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아직 '윤리'가 확립되지 않은 무주공산에 뛰어들어 이득을 취하고 도망가는 이른 바 '먹튀'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https://www.ai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488
Ai 서버센터와 증기탕 지구, 시간에 쫓기는 노동자 이미지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을 읽고 깨달은 것은 AI 생성기 분야는 지식 민주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있어도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더 밀접하고, 친연하고, 그냥 한통속이다. 환경문제가 자본주의와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환경문제는 '문명화'와는 마치 아주 밀접한 듯 보여도 사실은 별 관련이 없다. 기술 문명화가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이 생산하고 공급 과잉을 일으킨 후에 더 소비하게 부추기는 현대 경제의 체계 자체가 문제이다.
https://blog.aladin.co.kr/742016184/15069795
결국은 시간 분배의 문제이다. 우리가 여가 시간을 더 갖기 위해 생산력, 생산효율을 높여야 한다느니 하는 순진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그게 아니다. 우리는 돌봄 노동과 같은 성장 위주 경제에서 천대시하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그리고 생산 속도 자체를 그냥 늦추어야 한다. 기술 개발로 더 빠른 생산속도를 갖추고 난 뒤에 시간 분배를 하겠다는 발상은 마치 백만장자가 되고 나면 이웃을 돕겠다고 선언하는 수전노 같은 태도이다.
이웃돕기를 하기 위해 백만장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가시간을 내기 위해 AI로 5분 안에 이메일 500통을 맞춤형으로 생산할 필요도 없다. 그냥 지금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고 지금 가진 시간을 조금씩 내놓으면 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이 글은 오래 전에 쓰다가 멈춘 채로 저장해둔 글이다. Chat GPT 광풍이 불 때 쓰기 시작했던 글인데, 두어 달 지나자 광적인 열기가 사그라들어서 마무리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생산력을 올려서 세금을 더 걷자'는 엉뚱한 소리를(그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AI 생성기와 연결 짓는 사람을(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만났다. 그분이 매우 지적이고 훌륭해 보여서 더 충격이었다. 아니, 대체 이런 생각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 것이지? 그런 데다가 어제 북토크에서 돌봄 문제와 연결된 자본주의적 시간 착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터라 이 글을 마무리 지을 필요성을 깨달았다.
'더 빠르게 더 많이 생산하자, 그 다음에 여유를 주마.' 그러나 여유가 확보되는 속도는 언제나 저만치 앞서 가 있다. 이런 산업 및 노동 체제를 지탱하는 축에는 GDP 위주의 경제 시스템이 있다. 어제 대안이 될 만한 지표인 참진보지수(genuine progress indicator, GPI)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그 지표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다음 독서 목록에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을 올려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