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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Dec 06. 2023

정시 퇴근해도 돼. 단, 일 다 끝냈으면.

살고 쓰다

노동시간 단축이 기술의 발달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우리는 하루 1시간 노동하고 23시간 쉬어야 했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바퀴가 없어 무작정 걷던 시대보다 지금 몇 배가 더 빨라졌나?


과업 수행 시간의 단축은 그 과업 수행물 전체의 질적 향상과 관련이 없고(위대한 사상과 패러다임은 깃털펜과 붓끝에서 나왔다.), 그 과업수행자들의 복지와도 아무 상관 없다. 그냥 그건 시간 단축 경쟁이다. 그리고 경쟁논리가 침탈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자본주의가 '시간'이라는 공유 자본을 사유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기술의 발달 자체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80년대에 만들어낸 2000년대 상상도는 단순히 기술에 대한 공학적 지식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아래 링크 참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2100600329215008&officeId=00032&publishDate=1982-10-06&isPopular=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501947#home



누군가 빠른 타이핑이 가능한 기계를 개발하고 있다면, 그의 머릿속에는 있는 기대는 뻔하다. 그 기계를 이용해 빨리 쓰고 절약한 시간에 여가를 즐기는 삶을 상상할 것이다. 그 기계로 인해 활자가 3배나 빨리 생산되어 사람들이 읽어주기도 전에 죽은 데이터가 되어 쌓여가는 세계를 상상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상으로 기술 개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빌런다운 빌런일 것이다. 


그 낙관적인 상상에서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사실 그런 삶을 만드는 주된 힘은 기술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기술 없이도, 과업수행 대리 기계가 없이도 실현 가능하며, 그 방법은 식인 자본주의의 침탈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인간의 삶에서 침탈 불가능한 공유지를 사수하려는 정치적 선택들이 모여야 가능한 결과이다. 기술 개발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이 다르게 행동한다. 예를 들어 클락스월드 투고 중지 사태를 보자.


https://gizmodo.com/chatgpt-ai-water-185000-gallons-training-nuclear-1850324249


AI 생성기로 대충 생산한 엄청난 양의 SF 소설들이 클락스월드에 폭탄 투고된 적이 있었다. 양으로 때려 박아서 그 중에 하나라도 걸리면 상금을 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다수의 (지극히 평범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 저지른 파국이다. 


사람들은 방금 나온 따근따근한 기술로 쉽게 돈을 벌어들일 궁리만 한다. 내가 더 빠르고 더 쉽게 생산한 생산물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서 다른 쪽에 공급 과잉을 일으키고, 자신이 일으킬 시장 교란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 채로 초기 생산자로서의 이득만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술만 내놓으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아직 '윤리'가 확립되지 않은 무주공산에 뛰어들어 이득을 취하고 도망가는 이른 바 '먹튀'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https://www.ai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488


Ai 서버센터와 증기탕 지구, 시간에 쫓기는 노동자 이미지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을 읽고 깨달은 것은 AI 생성기 분야는 지식 민주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있어도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더 밀접하고, 친연하고, 그냥 한통속이다. 환경문제가 자본주의와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환경문제는 '문명화'와는 마치 아주 밀접한 듯 보여도 사실은 별 관련이 없다. 기술 문명화가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이 생산하고 공급 과잉을 일으킨 후에 더 소비하게 부추기는 현대 경제의 체계 자체가 문제이다. 


https://blog.aladin.co.kr/742016184/15069795


어제 낸시 폴브레의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을 번역하신 윤자영 교수가 진행하는 온라인 북토크에 참여했었다. 책 내용에 대한 짧은 강의 후에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서 '노동 시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돌봄' 이야기를 한다면 문제 의식이 그쪽으로 가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은 시간 분배의 문제이다. 우리가 여가 시간을 더 갖기 위해 생산력, 생산효율을 높여야 한다느니 하는 순진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그게 아니다. 우리는 돌봄 노동과 같은 성장 위주 경제에서 천대시하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그리고 생산 속도 자체를 그냥 늦추어야 한다. 기술 개발로 더 빠른 생산속도를 갖추고 난 뒤에 시간 분배를 하겠다는 발상은 마치 백만장자가 되고 나면 이웃을 돕겠다고 선언하는 수전노 같은 태도이다. 


이웃돕기를 하기 위해 백만장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가시간을 내기 위해 AI로 5분 안에 이메일 500통을 맞춤형으로 생산할 필요도 없다. 그냥 지금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고 지금 가진 시간을 조금씩 내놓으면 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이 글은 오래 전에 쓰다가 멈춘 채로 저장해둔 글이다. Chat GPT 광풍이 불 때 쓰기 시작했던 글인데, 두어 달 지나자 광적인 열기가 사그라들어서 마무리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생산력을 올려서 세금을 더 걷자'는 엉뚱한 소리를(그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AI 생성기와 연결 짓는 사람을(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만났다. 그분이 매우 지적이고 훌륭해 보여서 더 충격이었다. 아니, 대체 이런 생각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 것이지? 그런 데다가 어제 북토크에서 돌봄 문제와 연결된 자본주의적 시간 착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터라 이 글을 마무리 지을 필요성을 깨달았다. 


 '더 빠르게 더 많이 생산하자, 그 다음에 여유를 주마.' 그러나 여유가 확보되는 속도는 언제나 저만치 앞서 가 있다. 이런 산업 및 노동 체제를 지탱하는 축에는 GDP 위주의 경제 시스템이 있다. 어제 대안이 될 만한 지표인 참진보지수(genuine progress indicator, GPI)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그 지표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다음 독서 목록에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을 올려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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