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쓰다
요즘은 '어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어른이 되기 싫어하는 화자들로 넘쳐나는(넘쳐나던) 대한민국이지만, 나는 그런 화자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인 척하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등이 굽었을 때, 나를 만난 사람들이 '어른'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인지 가끔 그 화두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인격적 성숙은 분노 없는 상태인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남자들 몸에 알을 낳는 외계인을 상상한다든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남녀의 사회적 지위를 역전한 세계를 상상한다든지, 어슐러 르 귄이 달팽이처럼 번식기에 성별을 임시로 결정하는 외계인 종족을 상상하는 것, 마거릿 애트우드가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로 생각해 물건처럼 거래하고 소유주에게 복속시키는 사회를 상상한 것은 '장르적'이었다. 그런 반성을 주류 문학의 반성과 등치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르적 반성에는 일종의 '분노'가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드러나는 에너지 말이다. 그런 에너지가 드러나면 '애들이나 읽는 문학'으로 치부하는 태도야말로 미성숙한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혼탁하고 거친 세상을 '소풍'으로만 보려 드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분노만큼 더러운 것도 없다.>
한때 한국문학에서 시단이나 소설계나 할 것 없이 '미성숙'을 미학의 표지로 삼은 작품들이 넘실댄 적이 있다. 그런 작품들을 읽고 갸우뚱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라니 그런가 보다.' 그렇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은 적이 있다.
'미성숙'을 미학의 표지로 내세운 작품들은 대개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을 거칠고 날 것인 채로 드러내곤 했다. 매만져서 요철을 없앤 감정들보다 그런 울퉁불퉁한 감정들이 신선했던 시기였다. '새롭다'는 느낌을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과 미성숙한 화자에서 발견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요즘은 나도 읽기 줏대가 생겨서 예전에 멋 모르고 읽었던 몇몇 글들은 읽으면 인상이 찌푸려진다. '분노'란 자기 자신을 위해 발산할 때는 매우 더러운 감정이다. 더러운 것, 그로테스크한 것을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시기에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 우리가 이 정도는 재미로 읽으면서 우리 자신의 진짜 삶은 문제 없이 가꾸어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지금 내 기분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 현실이 시궁창 같아질수록 글에서까지 그런 이기적 자아들을 보는 게 부담스럽다. 어느 한 곳은 탈출구가 있어야 하지 않나.
<빵 굽는 냄새는 화낼 만한 일인가?>
자기 자신을 위한 분노를 마치 타인을 위한 분노인 것처럼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서관에 갔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누군가 도서관 사서에게 냉정하고 공격적인 어조로 항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했다.
우리 도서관은 1층 로비의 카페에서 빵을 구워 팔고 있다. 빵이 나오는 시간이 되면 도서관 로비 전체에 은은한 빵 굽는 냄새가 퍼져 나간다. 빵은 갓 구워 따뜻한 상태로 진열된다. 어린이자료실 앞을 지나치던 학부형들은 아이에게 간식으로 따끈한 빵을 사먹일 수 있다. 나도 우리 아이와 로비에 앉아 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아이의 입에 따끈한 빵을 사물린 적이 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항의를 하는 이용자는 도서관에 빵 굽는 냄새를 없애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자기는 공공도서관에서 이렇게 빵을 구워대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칸막이도 없고 냄새를 막을 수 있는 공간도 아닌 곳에서 왜 빵을 굽냐고 항의하는 것이었다. 도서관이 장사하는 사람의 것이냐고 말이다.
사서는 1층 카페가 들어서고 오히려 도서관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평들이 많다며 그 분을 설득했지만, 그 분은 끝내 이런 항의는 어디 가서 해야 하느냐고, 시청에 문의해야 하는 거냐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윗분들에게 이 민원을 꼭 전달 바란다며 뻣뻣한 태도로 자리를 떠났다.
그 분이 가시고 나서 나는 사서에게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저기, 아까 그 분이 빵 굽는 냄새를 항의하신 건가요?"
사서는 내가 다가가자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마 한 번 힘든 상황을 겪어서 자라 보고 놀란 마음이 솥뚜껑인 나를 보고도 뛰는 모양이었다.
"저는 그 냄새가 좋아요. 한 사람 의견 때문에 다시 살벌한 도서관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의견 올리실 거면 이런 의견도 부탁드려요."
내가 웃으며 속삭이듯 말하자 사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지어 옆자리 사서까지 웃었다. 사서가 하소연을 했다.
"안 그래도 저 분께 이런 좋은 평이 많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감시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지나치면 악취만 감시하는 게 아니라 빵 굽는 냄새도 감시하는 것이다. 그 분들은 세상이 무색무취의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때 히틀러도 세상을 정화하려고 했다. 순수한 아리안인들의 세계로 말이다.
나는 이제 악 쓰는 소리, 살벌한 소리를 하는 세계를 만나고 싶지 않다. 사춘기의 살의들을 재미로 받아주기엔 내 삶이 너무 팍팍하다. 자극적인 것을 표방하는 문학에 지쳤다.
그렇지만 세상이 소독된 곳은 아니라면 좋겠다. 빵 굽는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시끄러웠으면 좋겠다. 기분 좋은 자극이 많은 세계가 고요한 세계보다 나을 것이다. 나 자신을 소란에서 구해내려고 나의 분노를 쓰지 않았으면 한다.
분노는 타인을 위해, 약자들을 위해, 입 없는 자들을 위해 써야 악취를 풍기지 않는 감정이다.
훗날의 나를 일깨우려고 여기에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