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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Feb 02. 2024

이야기의 생산과 소비에 대하여

- 읽고 쓰다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라는 책을 읽었다. 기업인이자 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이 쓴 책이다. 책의 전반에 걸쳐 사회 각 분야에 대한 통찰력 있는 예견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주목한 것은 “작가는 사라지고 장르만 남는다”는 챕터였다. AI 생성기라는 도구의 등장과 함께 글쓰기라는 분야가 어떻게 달라질지, 그 달라진 풍경을 송길영은 어떻게 예측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집어들 때까지도 별 기대가 없었다. 인터넷 뉴스에서 접하는 이야기와 별다를 것 없으리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훑은 뒤 꽂아두고 나올 작정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송길영은 꽤나 꼼꼼하고도 현실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었고, 나는 책을 빌려서 도서관을 나왔다. 그리고 해당 챕터 뿐만이 아니라 전체를 다 읽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부분은 평소에 내가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AI가 창작 분야를 고사시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창작’하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만을 직업으로 삼으며 떵떵거리고 살 사람은 티끌만큼도 안 남으리라 예견한다. 그와 같은 맥락의 예견을 송길영은 이렇게 표현했다.      


최근 데이터를 보면 ‘글쓰기’에 관한 언급량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를 반영하듯 서점가에서도 글쓰기 책이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 과거 종이로 출판된 사무 자동화 책을 읽고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사무 기법을 배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글쓰기 책을 읽고 블로그에 일상의 단상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중략)
그런데 이렇게 모두가 작가를 꿈꾸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은 누굴까요? 지금은 독자보다 작가가 더 많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습니다. 유행이 되면 경쟁이 끝도 없이 치열해집니다. 이렇게 모두 한 방향으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누가 소비자가 될까요?
결국 서로가 품앗이하듯 소비해주는 작은 장터가 형성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너 웹 소설가야? 내가 그러면 글 한 쪽 100원에 사줄게’, ‘너 일러스트레이터야? 내가 이모티콘 2,000원에 사줄게’가 되는 것입니다. 온라인이 동네 상권화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동네 통닭집 주인이 옆에 있는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세탁소집 주인은 옆의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동네에서 행상으로 오는 판매상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는 벌기만 할 뿐 우리 동네에서 소비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상에서 이런 형태의 느슨한 자주적 공동체가 나오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 경우 큰돈을 벌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공급이 늘면 공급자당 큰 규모의 소비자가 나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근근이 먹고사는’ 모드로 접어들게 됩니다. (송길영, p.291.)     


송길영은 내가 주장하던 바와 같은 예측도에 ‘근근이 먹고사는 것’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근이 먹고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일을 좋아한다면 말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작지만 꾸준하게 먹고사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조차도 계속되려면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새것을 시도하면 선구자가 되고, 남들이 한 것을 따라 하면 카피캣이 됩니다. 타인의 성공을 따라 하던 시절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는 AI 시대에는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송길영, p.293.)    


흠, 저 용어, 괜찮은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근근이 먹고사는 것. 너무 낙관적이지도, 너무 비관적이지도 않은 느낌이다. 누군가는 비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나 같이 바닥 치는 비관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별로 그렇지도 않다. 약간 따스한 용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AI 시대에는 저자의 권위가 그 이전보다 낮아질 거라는 것, 그리고 관객의 취향에 세밀하게 쪼개진 ‘마이크로 팬덤 집단’이 생겨날 거라는 것, 작은 개인들의 연대 같은 컨텐츠 생산 – 소비 시장이 활성화 될 거라는 것. 시장이 그렇게 변해갈수록 결국 살아남는 자들은 ‘고유성’과 ‘진정성’을 가진 자들일 거라는 것.      


그런 와중에 ‘시대예보’가 시대를 앞서 넘겨다 보여 준다는 객관적 책무를 넘어서는 지점은 아래의 문장과 같은 것들이었다.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중략)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 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성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유성과 진정성의 단서가 내가 오랫동안 쌓아둔 내러티브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필수 전제가 됩니다. (송길영, p.299.)     


어쩐지 위로가 된다. 앞으로는 최고가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게 별로 효과도 없고 의미도 없는 짓거리가 될지 모른다. 그냥 최선을 다하자. 남이 나를 “저 사람은 그래도 이 분야에서 꽤 진정성 있는 사람이야.” 라고 인정해 줄 그날까지 그저 묵묵히 하던 짓을 할 수밖에. 남이 안 하던 짓, 안 하려 드는 짓들을 꾸준히 하면서 말이다. 


예술사회학


<예술사회학>이라는 책을 읽으며 예술을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본 뒤라서 저런 말들이 초연하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계를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안달복달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 


사실 예술계에서 ‘천재’라는 낙인(?)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르네상스 시대, 중세 시대 때까지만 해도 개인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 그런 과대포장은 없었다. 예술은 신과 신을 모시는 공동체가 정해둔 기준에 의해 집행되는 ‘수공품’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천재적 개인’이라는 발명품은 필연적으로 예술의 자본주의화 아래에서 탄생하게 된다.      


사회학자들은 “예술가” 개념을 탈신비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예컨대 “천재” 개념은 특별한 사람들이 가진 본래적인 정신적, 지적 특질의 표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붙여놓은 이름표로 간주된다. (데이비드 잉글리스·존 휴슨, p.38.)       


위와 같은 사회학적 접근법이 마음에 든다. 사회학적인 시선을 장착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내가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미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미친놈에게 ‘천재’라는 딱지를 붙이는 현상은 순전히 외부의 이권들이 결탁하여 카오스 같은 상태가 된 뒤에 확률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미쳤다’와 ‘천재이다’ 사이에는 ‘숨 쉰다’와 ‘육상 단거리 메달리스트이다’ 사이만큼의 간극이 존재한다.      


너무나 예술이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위의 말에서 오히려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운’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외친 뒤에 아궁이 앞에서 스케치한 종이들을 태우며 살아가는 편을 택할 수도 있다. 미친 게 아니라, 너무나 제정신이라서 말이다. ‘운’이 올 때까지 풀뿌리라도 캐 먹으며 버텨야 하니까.      


그런데 앞으로의 예술 시장에서는 그런 ‘고난의 행군’적 자세는 씨도 안 먹힐 가능성이 있다.      


이런 핵개인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네트워크’입니다. (중략) 협업에 있어 충분한 자기 위치와 역할을 찾아가려면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역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적 네트워크를 넘어선 기회를 계속 탐색해야 하는데 그 연결성이 단절된 경우에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므로 ‘우연의 산물serendipity’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론입니다. (송길영, p.315.)     


산에서 혼자 그림 그리는 자연인에게 관심을 줄 사람들이 사라질 예정이란 이야기이다. 물론 산에서 그림만 그리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 등등을 통해 자신을 생중계하고 있고, 비슷한 ‘자연인 예술가’들과 인친 맺고 계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소비와 생산의 관점에서 본 예술'을 다룬 예술 - 단편소설


작년에 읽은 단편소설집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단연 김솔의 『말하지 않는 책』이었다. 김솔이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너무 독특해서 호오가 심하게 갈리는 작가라는 사실도.     


내가 새삼 『말하지 않는 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아마도 송길영이 말한 ‘동네 상권화 되는 예술 활동’과 관련이 있지 싶다. 단편집 내내 흐르는 ‘쓰기’에 대한 냉소적 풍자들이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록된 작품 중에 「Little Boy」는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글이면서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는 글이라 소개하고 싶다.  (하단에 링크 첨부)


이 소설에서는 작가가 너무 많아진 사회를 가상으로 그리고 있는데, 얼마나 많아졌냐면 상대를 높이는 ‘습관적’ 호칭으로 작가님을 쓸 정도이다. 지금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아무에게나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대충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그런 세상이니 오히려 독자가 귀하고, ‘스타 독자’는 있어도 ‘스타 작가’는 없다. 책을 팔고 싶으면 ‘스타 독자’의 추천사를 받아야만 한다.      


웃긴데 못 웃겠다. 가상이 아니라 코 앞의 현실인 것 같아서.     


요즘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김솔 소설과 같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인기 작가 계정보다 파워 독자 계정의 팔로워 수가 더 많은 것이다. 작가는 자기 작품만 홍보하지만, 파워 독자는 광범위하게 읽고, 읽을 만한 책에 대한 정보를 전한다. 내가 읽는 사람이라면, 나 또한 파워 독자를 더 신뢰할 것 같다. 작가가 되기 전의 ‘순수’ 독자로서의 내 마인드를 떠올려 보면, 작가를 팔로워 한다면 정말 골수팬이 된 한두 명만 팔로워할 것이고, 나머지는 나와 같은 독자들의 계정을 엿볼 것이다. “같이 읽어요!” 하면서 말이다. 물론 지금 나는 ‘작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작가들의 계정이 궁금하다. 다들 뭐하고 사시나, 어떻게 사시나, 그런 게 궁금하고, 다들 우리 동네 주민 같이 느껴진다.      


주민들끼리 ‘장사 잘하고 지내시는지’ 인사하고 지내는 것도 나쁠 것은 없는데, 송길영의 말처럼 ‘근근이 먹고사는’ 이 바닥에서 동네 주민으로 있으니 관광객으로 돌아다니는 편이 신나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이 생산 과잉의 시대에 누군가 내게 ‘소비’하는 대가로 돈을 준다면 참 좋겠는데.     


배명훈은 단편소설 「수요곡선의 수호자」에서 소비하는 로봇 ‘마사로’를 만들어내서 나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 적이 있다. 배명훈 소설가가 보여 준 ‘마사로’는 훈훈했지만, 어째서 마사로 같은 것을 만들게 되었나를 알게 된 순간에는 허탈했다. 작가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혁신도전 프로젝트 테마발굴협의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굉장히 밥을 빨리 먹는 위원들(이 사실은 매우 중요함. 왜 빨리 먹을까. 왜 시간이 없으실까들.)’과 교류하며 착상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는 정말로 ‘소비하는 AI’를 제안했다가 까였다고 한다.   

   

저런 제안을 했던 작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소설 쓰는 AI가 생기면 GDP가 상승하나? 엄청나게 쏟아지는 생산물들을 그만큼의 속도로 소비해줄 소비자 그룹이 없는데? 창작물의 대공황이 오지 않으려면 소비도 AI가 해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AI(의 보조로 빠르게 생산한) 창작물을 요약해주는 AI 독자(감상자)의 서비스를 받아서 대충 읽었다 치고(다 봤다 치고) 내 작품을 만들면 그것을 또 AI가 감상해 주면서 감상한 대가로 소소한 돈을 지불해 주고, 요약본을 만들고, 그 요약본을 보고 다시 창작을…….      


농담 같나? 농담 아니다. 나, 지금, 진지하다.      


나는 요즘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보다 알라딘 북플의 헤비 리더들이 눌러준 ‘좋아요’에 더 열광한다(물론 인스타그램도 새로고침하며 내 게시물을 누가 봐주나 궁금해 한다. 불면의 침대 위에서는 더 그렇다.). 온라인 서점의 큰손 소비자인 분들이 내가 읽은 책, 내가 올린 리뷰에 공감을 표시하면 가슴이 콩닥거린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읽어내시는 분들이니 ‘같이 읽어요!’가 아니라 ‘같이 읽었습니까? 제가? 황송합니다.’ 기분이 되는 것이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 그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송길영에 따르면 ‘고유성’, 즉 독창적인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꾸준히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이런 평판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은 읽고 쓰는 일에 진정성이 있었지. 그걸 정말 사랑하는 게 보였어. 우리가 지켜봤으니 보증해.” 라고.                           


        

김솔, 「Little Boy」, 문장 웹진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list_no=2329&act=view&ord=B&nPage=1&c_type=A&c_page=     

김솔, 『말하지 않는 책』, 문학동네, 2023.     

데이비드 잉글리스 / 존 휴슨 지음, 신혜경 옮김, 『예술사회학』, 이학사, 2023.     

배명훈, 『미래과거시제』, 북하우스, 2023.     

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교보문고,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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