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는 14년형 스파크이다. 14년에 출고되었다. 2018년쯤에 중고차로 구입했고, 그때 가격이 아주 쌌기 때문에 아마 그때 이미 주행거리가 제법 되었을 것이다. (주행거리 얼마일 때 구입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로 큰 사고를 내서 엔진을 들어내고 다른 엔진을 넣었다. 그쯤되면 대개 폐차하는데, 그때 나는 당장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험으로 모두 처리하고 빨리 탈 수 있게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차를 새로 구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물론 금전적 여유도 없었다. 차를 사야 했다면 빚을 내야 했을 것이다. 예상하다시피 그 탓에 보험료가 폭등했다. 차를 새로 샀다면 냈을 돈을 폭등한 보험료로 서서히 갚아나가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이 정도만 설명해도 이 차로 먼 곳은 못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나는 이 상태의 차로 왕복 180Km 거리의 고속도로를 시속 120Km의 속도까지 올려가며 출근하고 퇴근한 적이 있다. 한 번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가 어린이보호구역 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모두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던 터라 전조등만 켰지 비상등을 켤 생각도 못했다. 앞의 검은 세단이 비상등을 켜지 않고 있던 탓에 추돌할 뻔 한 후에야 욕을 내뱉으며 나도 얼른 비상등을 켰다. 뒷차에 받히지 않은 게 용했다. 출근 후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주어진 일은 해야 했다.
내가 왜 이런 출퇴근을 했냐고? 프랑수아즈 사강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자기파괴적 욕망을 과시하려고 한 짓이 아니다. 그냥 그 먼 곳에 일자리가 있었고, 그 일자리는 마트 캐셔나 보습학원 강사, 주당 14시간 이내 한정의 공공기관 일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자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내가 거의 그만큼의 통학거리를 이를 악물고 견디며 따낸 석사 학위를 쓸 수 있는 일자리였기 때문이다. 애써 따낸 학위를 써먹을 수 있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로 출근을 하든지 출근하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였다. 집 근처에 그런 일자리를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강과 반대로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그런 것이다.
대학원 통학을 경험해 봐서 장거리 통근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물론 대학원 통학은 주2~3회를 하면 되지만 전일제는 주5일이었으므로, 취업 후 나는 급히 방을 구해야 했다. 매일 그 통근 거리를 견뎠다가는 체력이 버텨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알잖은가? 우리 사회는 시간외수당도 없이 일을 시키는 사회이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다가는 해고 당한다. 나는 계약직이었다.
시어머니, 남편까지 모두 두 아이의 양육에 투입되었고, 나 역시 원거리를 미친 속도로 오가며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내 일의 특성상 토요일 근무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이들을 실어와서 사무실에 두고 태블릿과 핸드폰으로 좌석에 묶어놔야 했다. 사무실에는 나 외에 다른 근무자가 없었지만(얼마나 다행인가?), 전자기기가 없었다면 나는 단 한 건의 일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려온 날은 원룸에서 재웠다. 싱글 침대 하나뿐인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애 둘과 함께 자려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원룸에서도 혼자 애들을 건사하기 위해 IPTV나 태블릿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을 참고 있는데 애들이야 오죽했을까? TV와 유투브가 주는 마약 같은 쾌락이라도 없었다면 누구라도 울고 불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일상은 위태롭게 흘러갔다. 결국 일은 터졌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던 첫째 아이가 학원 통학차에서 이상한 말을 했던 것이다. 그 말은 학원차 운전 아르바이트 중인 지인을 통해 내 귀에 들어왔다. 자기는 밤새 핸드폰 게임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고.
나는 분노했다. 경계성 청각장애인인 시어머니는 그렇다치고, 남편은 뭘 했단 말인가? 내가 일터에서 근처 원룸에 들어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아이와 통화를 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잘 때, 혹은 밤 10시까지 오는 업무의 연장 같은 카톡들을 처리할 때, 그는 뭘 했단 말인가?
결국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남편 역시 직장까지 출퇴근 거리가 시간상으로는 나와 비슷했다. 나는 고속도로를 타고 그는 국도를 탄다는 차이뿐이었다. 나는 그가 없을 때 아이들을 돌볼 수 있지만, 그는 내가 없을 때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퇴사를 하고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복학하고 나서 같은 갈등이 계속 되었다. 우리는 지겹게 다투었고 아이들 앞에서 보이지 말아야 할 꼴을 다 보였고, 결국 남편은 조금씩 바뀌었다. 그는 이제 이해한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저 밥만 먹여주고 씻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양육은 전일제 일자리에 쏟아야 하는 에너지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해나가야 하는 과업이라는 것을.
요즘은 나보다 더 아이들에게 잔소리가 심하다. 아이들 핸드폰에 감시앱을 깔아놓고 시시때때로 점검하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내가 오히려 말릴 정도다. 숨쉴 틈은 주어야지, 너무한다면서.
남편이 아이들의 학업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심리가 ‘대치동 아빠'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추측할 때도 있다. 남편은 육아 때문에 많은 야망을 내려놓았다. 내가 고분고분했던 시절에는 갓난쟁이와 3살짜리 아이를 내게 다 맡겨두고 직장 상사의 개인적 사업(농업)까지 도우러 다녔다. 그러다가 이혼 당할 뻔했지만.
지금 남편은 직장에서 제의받는 과외 업무 중에 보장 없이 기회만 있는 일거리들은 거의 거절한다.(적어도 그러려고 애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부부이지만, 그의 안에서는 ‘포기'에 대한 보상 심리가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포기한 대가로 주어진 결과가 수식어 없는 ‘그냥’ 아이들이란 사실에 속이 쓰린 것이다. 하나를 포기했으니 다른 하나를 얻고 싶은 것이다. 그 많은 대치동 엄마들처럼. 몇몇 대치동 아빠들처럼.
그런데 인생이 그런가? 하나를 포기할 때 주어지는 다른 하나가 포기하면서 기대하는 것이 아닐 경우가 많다. 손을 펴 보면 엉뚱한 것이 남겨져 있곤 한다.
마치 영화 <풀타임>의 여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던 전화를 받고 울음을 터뜨렸던 것처럼.
<풀타임>은 일상 스릴러다. 보는 내내 PTSD가 오는 듯 손이 떨렸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다룬 <시카리오>에서 잔혹한 장면을 볼 때나 <삼체> 시리즈물에서 나노 섬유를 이용한 잔혹한 민간인 살상 장면을 볼 때조차 이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그건 그냥 아드레날린이 치솟게 하는 허구 즉 ‘그럴 듯해 보이는 거짓말'들이었으니까. 상상 속의 세계였으니까. 그런데 <풀타임>의 세계는 진짜였다. 그건 내가 직접 겪었던 세계였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머물러 있는 세계이다.
<풀타임>의 주인공 쥘리는 아이 둘을 혼자서 양육하는 싱글 워킹맘이다. 5성급 호텔 메이드로 일하기 위해 파리 근교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파리 시내까지 출퇴근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열차가 파업을 한다. 이제 이 여자는 출퇴근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뛰어라. 물어라. 찾아내라. 직장과 집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을. 매일 바뀌는 교통 상황에 맞추어, 연락되지 않는 전남편이 부쳐주지 않는 양육비 때문에 비어가는 통장을 의식하면서, 베이비시터(아이 돌보미)의 항의와 협박에 응대하면서. 그 와중에 아이 생일을 챙겨야 하고, 그 와중에 현재 직장상사 모르게 이직할 일자리의 취업 면접까지 봐야 한다.
이 스릴, 정말 대단하다! 가슴이 뛰다가 못해 멈추는 줄 알았다. 차라리 킬러가 나와서 철사로 주인공 애인의 목을 자르는 편이 보기 낫겠다. 잔인한 장면은 하나도 없고 피곤한 얼굴의 중년 여자 하나가 화면에 나올 뿐인데, 보다가 찬물이라도 마셔야지 그냥 보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다.
영화 밖의 나뿐 아니라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도 쥘리는 위태롭고 숨가빠 보인다. 직장 동료는 쉽게 충고한다.
“파리로 이사 와요.”
쥘리는 말한다.
“그런 닭장 같은 곳에서 애들을 키울 순 없어.”
동료는 기분이 상한다. 그가 사는 곳을 닭장이라고 표현하다니.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다. 쥘리는 지나치게 솔직했을 뿐이다. 파리만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있는 곳에서 살기 위해 주거 환경을 포기한다. 나도 장거리 출퇴근을 할 때, 미친듯이 집을 구했다. 그러나 답은 뻔했다. 그 인근에서 지금의 주거환경과 비슷한 곳을 찾으면 집값이 2배도 넘었다. 가격이 비슷한 곳은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을 이곳에서 키울 수 있을까?
이사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왜 일자리를 그곳에 구했나? 집 근처에서 구했어야지.
집 근처 어디? 마트?
영화에서는 돌보미 할머니가 아이들을 데려가야 할 시간에 자꾸만 늦는(심지어는 차편이 아예 끊겨서 아이를 그 집에서 재워 달라고 부탁하는) 쥘리에게 일침을 놓았다. 집 근처 마트에 취직하라고.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아이스크림 가게 종업원이 떠오른 건 왜일까?)
아이스크림 가게 에피소드는 소설판에 나온다.
(※이후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바람.)
위태로운 일상을 겨우 꾸려가던 쥘리는 결국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그녀는 이력서에서 ‘석사’ 학력을 지운다. 그리고 그 이력서를 들고 마트에 가지만, 책임자의 답변은 “당신 같은 사람 많아요.”이다.(실제 대사는 취업을 소개한 돌보미 할머니 이름을 대자 “그분 자주 그러세요.”였다.)
삶은 대개 그렇다. 최선을 포기하면 차선을 얻을 수 있다고 쉬운 충고들을 하지만, 그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은 외부인들이다. 잘 모르면서 통념으로 충고하는 것이다. 그런 안이한 충고를 진지하게 듣고 최선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포기하고 나서 깨닫는다. 최선을 포기했다고 차선책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집으로 돌아가려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쥘리
감독은 ‘야망이 있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단의 <씨네21> 인터뷰 기사 참조) 그런데 나는 그 ‘야망'이란 단어가 너무 슬펐다. 그게 야망인가? 여성이 석사 학력을 썩히고 싶지 않아서 아등바등하고, 장거리 출퇴근을 감행하는 게? 아이를 닭장이 아닌 집에서, 곰팡이와 외풍이 없는 집에서, 교육 환경이 좋은 곳-학군이 좋은 게 아니라 교육 여건이 좋은 곳, 다시 말해 대치동이 아니라 운동장이 있는 학교와 신호등이 잘 정비된 통학로와 도보 거리에 공원이 있는 곳에서 키우고 싶어 하는 게? 휴일에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싶은 것이 야망인가?(대한민국 환경으로 치환하자면 아파트 놀이터로 바꾸어야 할 테지.)
그래, 그것은 야망이다. 야망 외에는 표현할 단어가 없다. 슬프지만 그렇다. 여성에게나 적용되는 야망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처럼 애들을 위해 런던을 떠났다가 몸을 팔아야 할 정도로 빈곤해지는 여성도 있질 않은가? 방송대학교 공부조차 못 하는 그런 여성도 있질 않은가? 그런 여성도 있는데 쥘리는 야망에 불타는 거지.
여성의 야망이란 그런 것이다. 영화 속의 전남편이란 작자와 비교해 보라. 수십 통의 전화에도 연락두절 상태이더니, 아이 생일이 다 끝난 뒤에 연락이 와서 말한다. 자기가 아이 생일을 잊었을까봐 그러냐고(이미 지났는데!). 양육비 넣었으니 확인해 보라고. 쥘리가 배터리가 나간 줄 모르고 휴대폰을 놔둔 덕분에 받지 않은 전화를 두고(매번 챙기는 게 이상하지, 일상이 분초를 다투는 전쟁터인데.) 자기가 전화를 안 받아서 화나서 보복으로 전화를 안 받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주어야 할 양육비를 한참 지나서 보내놓고는 진심으로 미안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쥘리 전남편의 음성 녹음이 나올 때 화면을 주먹으로 한 대 칠 뻔했다.
어느 유투브 방송에서 남자 셋이 <풀타임>을 리뷰하는 걸 보았다. <풀타임>은 남녀 대결 구도를 만들지 않는단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남자를 나쁜 놈 만들지 않았단다. <81년생 김지영>과는 다르단다. 거기서는 남자를 나쁜 놈 만들었는데, <풀타임>은 아니란다. <풀타임>의 전남편에게는 사정이 있었단다.
사정이라니? 무슨 사정? 프랑스에 없어서 연락을 못 받고 못했다는 사정? 쥘리는 사정이 없어서 통근 열차 파업 중에 미친 듯이 장거리 출퇴근을 했나? 위험을 무릅쓰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직장 상사와 싸우고, 동료에게 편법을 가르치고, 거짓말을 하고, 우리 둘 다 사는 길이라고 계속해서 협상을 하면서, 비굴하게 자녀의 학교 친구 학부모에게 사정을 하면서, 기타 등등 이 지면에 다 말하지 못하는 많은 난관을 곡예하듯 타넘으면서, 그 와중에 아이 생일을 챙기기 위해 트럭을 렌트해서 생일선물을 실어왔을까? 어째서 잠도 못 자고 트램벌린을 설치하고 아이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있나? 왜 아이에게 “엄마가 지금 니 생일까지 챙길 상황인 줄 알아?” 라고 해버리지 않았나? 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생일 파티에서 아이들의 술래가 되어 함께 놀고 있나?
지금 나는 쥘리의 저 웃음이 어떤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인지 알기에 마음이 아프다.
쥘리에게는 그 어떤 사정도 아이들보다 우선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변명할 수 없었고 회피할 수도 없었다. 뒷전으로 밀어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쥘리에게는 사정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이다.
위의 논리는 일하는 여성들이 직장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누구는 사정이 없는 줄 아나? 너만 아이 키워?
나는 <풀타임> 속의 전남편이 <82년생 김지영>의 정대현보다 훨씬 나쁜 놈이라고 본다. 오죽했으면 이혼했을까.
과소 재현되면 관객(독자)는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워 넣는다. 자기들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말이다. <81년생 김지영>은 남성 캐릭터를 비중있게 다루었을 뿐이다. 사회제도와 관습의 구조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안 나쁜 남자'가 되려는 캐릭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점에서는 <며느라기>의 무구영도 비슷했다. 강화길 단편소설 <음복>의 남편 캐릭터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경상도 지역의 어떤 맘카페에서는 ‘저 정도면 나쁜 남편도 아닌데 김지영은 오바 아닌가?’ 하는 여적여 발언들도 난무했었다.)
남성은 ‘야망'이 있을 때, 아이들을 외면한다. 혹은 아이들을 전담할 배우자를 찾는다. 그리고 외면한다.
여성은 ‘야망'이 있을 때, 남편에게 버림 받는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키울 최선의 상황을 찾는다. '혼자서'. 그리고 비난 받는다.
위 문장의 일반화가 사람들을 뜨악하게 만들 날이 오기를 바란다. 아무도 위 문장에 공감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수와 소수가 뒤집히기를 바란다.
쥘리는 호텔 메이드이다. 흰 앞치마와 검은 원피스 차림의 유니폼 미장센은 여성'만'이 고용되는 직업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자들 똥을 손으로 닦기 싫으면 이 일 그만둬."
<풀타임>은 정말 굉장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서사'의 미래에 대한 여러 생각에 잠겼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로 풀 수 없는 많은 현대적 아젠다들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 것인가 힌트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비교하게 되는 점들도 있었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와 계급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도 다르다.
이 스릴 넘치는 일상의 재현물은 그림자 노동, 돌봄 경제학, 페미니즘 경제학 등등 현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와 대안 경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에코 페미니즘까지 포괄하는지도 모르겠다. 쥘리의 일상을 보면 인류가 멸종하는 최선의 방법대로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사회문화적 억압들이 보인다. 매연을 생산하고 전기를 써가며 죽어라고 기를 써야 일상이 굴러간다. 쥘리에게만 야망을 포기하게 종용할 게 아니라 인류가 전부 야망을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하기엔 이 지면은 너무 좁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그 모든 이야기를 또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적어도 <풀타임>이 끝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