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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Aug 05. 2024

작은 것들을 수호하는 작지 않은 작가 의식

읽고 쓰다 -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김유태의 『나쁜 책』

예술이란 무엇인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인간의 감각기관이 단박에 인식하는 것-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다. 추상화라고 불리는 미술조차 색채와 얼룩의 형태를 이용해 인간의 시각을 자극해야 한다. 


언어를 이용한 문학예술에서 구체화는 두 가지 기법을 사용한다. 한편으로는 비유와 상징 같은 수사적 기법을 이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삶에서 미세한 부분으로 파고드는 확대경을 들이대 왔다. 그것이 문학 예술의 소임-삶의 부조리를 구체화하는 작업-이었다. 


언제인가부터 한국 문학계에서 타인의 삶을 노출하는 소설가들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균형을 지키려고 애쓴 느낌이 역력한 어느 기사문(관련기사 하단 첨부)을 읽으며 복잡한 의문들이 생겨났다. 누가 약자인지 모호한 상황이 되면, 지식인들은 으레 대중의 반대편을 약자라고 규정한다. 지식인 개인 쪽을 표현의 자유를 수호한 투사로 취급한다. 그런데 그런 분류법은 '항상' 옳은가? 


소설가들은 고래로부터 타인의 삶을 질료로 이야기라는 예술품을 창조해왔다. 그런데 그때 가져온 타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만약 어떤 작품에서 특정인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 자체의 잘못인가, 오염된 독법을 지닌 독자의 잘못인가? 타인의 삶은 정치적 의도와 분리된 '순수예술'이라는 망상에 복무할 수 있는가? 타인의 삶은 그 삶을 언어로 재현해 점유한 소설가 개인의 것인가? 재현의 언어라는 직물로 된 소설가 개인의 패션을 구성하는 일부분인가? 아니면 공동의 경험이라는 공유재를 한 개인이 상업적으로 선점한 또 다른 형태의 인클로저일 뿐인가?


1920년대 대표 여성작가 김명순


한국문학사에서 독법이 오염된 사례로는 니카니시 이노스케의 소설『汝等の背後より』에 김명순이 모델이라는 소문이 붙었던 일을 들 수 있다. 해당 소설의 주인공 '주영'이 독립운동가였으며 임신한 상태로 폭탄을 투척한 여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명순을 오버랩시킨 소문으로 추정컨대 당시 대중 정서에는 김명순에 대한 호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인들은, 특히 남성 문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김기진, 방정환 등은 크게 화를 내며 공개적으로 김명순을 비난했다. 그 '타락하고 방종한' 여자는 주영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 남성 문인들은 김명순을 깎아내림으로써 그들이 추앙하는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과 실존 여성을 분리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은 실존 여성이 영웅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럴 자격도 없는' 여성이 추앙받는 꼴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을 것이다. 영웅이 될 수 있는 여성은 죽은 여성뿐이었다. 여성은 살과 피를 지닌 채, 섹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한, 결단코 영웅이 될 수 없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타인의 삶을 무단점유한 사례 또한 김명순에게서 찾을 수 있다. 김동인은 김명순을 모델로 <김연실전>을 써서 신여성 전체를 비난하는 수단으로 썼다. 당시에 김명순은 그런 조리돌림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방정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오히려 당대 지식인들의 미움만 샀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들에 방정환은 풀려났고, 김명순은 해고되었으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문단 경력이 끝장나게 되었다. 이 땅에서는 더 살 수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김명순은 그곳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김명순의 삶, 그 삶의 일화들은 사회가 시대 윤리의 양면을 모두 사용해 개인을 무참히 짓밟은 선례로 점철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 '그녀'는 화제가 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경우에 그녀는 조리돌림감으로 화제가 되어야 했다. 시대의 기득권 윤리는 칼등과 칼날을 모두 사용해 한 여자를 회 치고 다져놓았다. 표현의 자유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펜 쪽에 존재했다. 대상화를 거부하는 저항은 '무식한' 소리였으며, 방종한 여인의 자기고백체 목소리는 들을 가치가 없는 잡글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슬로건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표현의 자유라는 깃발이 나부끼면 경험이라는 공유재가 누군가의 저술이라는 울타리 속에 들어가더라도 아무 저항도 하면 안 되는가? 그거 내 땅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가? 억울하면 너도 네 울타리를 치라고, 울타리 위에 올라가서 발가벗고 춤추는 일에 합류하라는 권유는 폭력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경제관념에 충실한 합리적 충고인가?


문인이 아무런 권력도 없는 지식인이라고 가정하는 전제에 의문이 든다. 문인은 뭐든 써도 되는 것일까? 문인이 쓰는 것이 특정 개인의 '조리돌림'의 근거가 된다면, 그래도 그 글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 모두가 필(筆)을 휘두를 수 있는 시대라서 상관없는가?


창작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면, 독자들은 어째서 무한한 독서의 자유를 주장하지 않는가? 창작자들은 모두 표현의 자유 편에 서 있고, 독자들은 오로지 검열자의 위치에 서 있는가? 그러면 어째서 '금서' 딱지가 붙은 책들이 그 딱지가 붙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릴까? 금서들을 쓴 작가들은 어째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검열에 저항하며 자기 작품들의 '금지된 재현'들을 굳건히 수호하는가? 금서의 작가들은 어째서 책을 퍼뜨린 죄로 살인 허가 명령이 떨어져도 자기 책을 거두어들일 생각이 없는 것일까? 목숨보다 더 자신의 '표현'을 수호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금서로 지정된 책을 목숨을 걸고 찾아내 읽고, 그 벌을 달게 받는 것일까? 어째서 쓰고 읽는 일을 생존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일까?


김유태 기자가 금서를 소개하는 책, 『나쁜 책』.


김유태 기자의 『나쁜 책』을 읽었다. 기자는 신문에 신간 소개 코너를 맡고 있었다. 『나쁜 책』의 서문에는 매주 책상에 산처럼 쌓이는 '안전한 책들의 칵테일 파티' 속에서 가치 있는 책들을 찾으려 애썼던 고백이 담겨 있었다. 서문을 읽는 동안에 창작자로서 부끄러웠고 창피했다. 내 안의 검열자들을 보았다. 내 글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검열자들. 


『나쁜 책』의 본문에 들어가자 이름만 들어도 전율이 이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아이리스 장, 팡팡, 옌렌커, 비엣 타인 응우옌, 켄 리우, 토니 모리슨, 척 팔라닉,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밀란 쿤데라, 보후밀 흐라발, 이문열, 레이 브래드버리, 이스마일 카다레, 필립 로스, 주제 사라마구, 니코스 카잔차키스, 미셸 우엘벡, 아룬다티 로이, 조지 오엘 등등...... 책을 다 읽고 나자 한국 문단에서 벌어진 일들이 초라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자기 옆에 있는 한 여자(혹은 성소수자 한 남자)를 조물락조물락거리지 말고, 그들의 작은 비밀들을 점유하려 하지 말고, 큰 세계를 향해 일갈을 날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가장 가까운 지인, 애인, 오랜 친구의 껍질을 까서 단물을 빠는 것이 세계를 향한 고발이 될 수 있을까? 현대 소설이 추구하는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현미경 같은 시선'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야망이 큰 창작자인가보다. 창작물의 독립적 상품성보다 작가의식의 윤리성을 옹호하고 싶다. 


아룬다티 로이의 아름다운 소설, 작은 것들의 신


김유태의 책을 읽으며 내가 의외로 금서들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속에 소개된 책들을 하나씩 독파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집어든 책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었다. 도입부는 진도가 지지부진했지만, 곧 무서운 속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진작 읽어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대체 왜 이 소설은 인도에서 '외설'로 금서가 된 것일까?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장면들에서 외설을 느낀 사람들은 어떤 독법으로 읽은 것일까? 로이가 인도 사회 전체에 단단하게 더께로 앉아 있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을 홀랑 걷어내고 숱한 부조리들을 드러냈기에 너무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을까?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다수인 사회에서라면 작가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 다수와 싸우는 하나의 펜이 되는 것이다. 그때의 펜은 권력이 아니라 저항이다.  


『작은 것들의 신』은 리얼리즘 작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현대소설의 패션이 되어버린 부재하는 스토리와 지엽적인 묘사들에 지쳐 있다가 단비를 만난 기분이었다. 갈라진 논바닥이 비를 머금듯이 소설을 읽어나갔다. 간명하고 단순한 스토리가 있었고, 그 스토리가 인생이 되어갔다. 단순한 스토리가 인생처럼 보이려면 어떤 식으로 구체성을 획득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으며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나갔다. 한 사건을 이루는 여러 사람들, 각자의 삶, 각기 다른 시선, 각기 다른 윤리들을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이야기. (이 비슷한 느낌을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을 때 받았지.)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사회 의식이 뚜렷한 리얼리즘 소설, 앵무새 죽이기 


19년도에 문창과 대학원 면접에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나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거론했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하퍼 리 소설의 지위가 강등되었음을 알았다. 몇몇 인종차별적 용어가 그대로 쓰인 것 때문에 비판받고 있다고 말이다. 그 사실을 면접 때 알았다면 『앵무새 죽이기』를 거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하퍼 리 소설의 아름다움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은 『앵무새 죽이기』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지점에 서 있었다. 이 소설은 인종과 종교가 혼재되어 갖가지 다층적인 인간 혐오가 광기를 부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금 수위가 높은 성적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상하다. 전혀 외설적이지가 않다. 슬픈 동화 같다. 잔혹하고 비정하고 슬픈 동화. 분명 에로스와 폭력적인 정념으로 가득 찬 소설은 아니다.(프랑스가 사랑한 몇몇 소설들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전혀 그런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은 매우 건조하게 묘사되어 있고 어떤 경우에는 냉소적인 어조까지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작가의 저항 의식이 또렷이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어떤 문제의식에 살을 바른 것인지 분명히 보인다.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자극해 정념의 미학을 창조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어 보인다. 폭력이든 섹스든 페이지에 펼쳐진 장면 속에 서 있으면 사람의 육신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장에서는 나는 깊은 연민에 휩싸였다. 정념이 아니라. 


『작은 것들의 신』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한 동안 멍하니 있었다. 한 편의 아주 길고 긴 시를 읽은 느낌이었다. 작은 것들의 신 혹은 큰 것들의 신이 외면해 버린 작은 것들에 대한 상념이 머리를 휘감았다. 


초심이 작은 것들 사이로 소용돌이치며 떠올랐다. 멋모르고 열정만 가득했던 2019년의 여름, 시간을 되돌려 대학원 응시생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작은 것들의 신』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요. 현실 비판과 사회의식이 뚜렷이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문장의 나열과 장면 묘사가 아름다운 소설이요."


작은 것들로 큰 이야기를 하고 싶다. 패션이 아니라 주제의식을 만들고 싶다. 잃어 버렸던 꿈을 되찾은 기분이다. 


『나쁜 책』 속의 소설들 중 명성만 듣고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많다. 차근차근 하나씩 읽어보고 싶다. 일단 아룬다티 로이의 논픽션 저술을 읽어봐야겠다. 작품으로만 승부 보겠다는 '순수' 예술 지상주의자들에게 아룬다티 로이를 들이대고 싶다. 우리에게도 이런 작가가 있지. 고(故) 조세희 작가, 정보라 작가 등등. 그리고 SF작가연대에 소속된 작가들의 활동들. 글들.


다음 책은  『눈 먼 부엉이』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538

여성문학연구모임, 『한국여성문학선집1』, 민음사, 2024.  

한승우. (2021).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소설 『汝等の背後より』를 둘러싼 김명순 혐오의 기록 . 국제한인문학연구, 29, 195-228.

송명희(Song Myunghee). (2017). 김명순, 여성 혐오를 혐오하다. 인문사회과학연구, 18(1), 123-154. 

김유태 ,『나쁜 책』, 글항아리, 2024. 

아룬다티 로이, 박찬원 옮김,『작은 것들의 신』,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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