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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Jul 25. 2024

극영화는 실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여인과 바다> 의 조력자 재현 - 읽고 쓰다

기분 전환용으로 본 영화가 의외로 명작일 때, 내가 생각해도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게 된다. 당장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른다. <여인과 바다>가 그런 영화였다. 주변에 추천하고도 욕 먹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건 두루 봐야해!


자, 여기까지.

영화 선정을 위해 이 글을 여셨다면 당장 화면을 닫고 영화를 보러 가시기를 권합니다. 이 아래로는 스포일러가 도사리고 있으므로 부주의한 스크롤은 참사를 유발합니다.


이미 영화를 보고 오신 분이라면, 계속 읽어 주세요.(이래도 영화 안 보고 읽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래서 너무 큰 스포일러는 자제하려구요.)


사실 며칠 전에 <위대한 쇼맨>(마이클 그레이시 감독, 휴 잭맨 주연, 2017년 작)을 봤는데, 노래와 춤 등의 볼거리로 채워지는 뮤지컬의 스토리는 단순명료해야 함을 이해하면서도 어딘지 2%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실존 인물인 바넘을 지나치게 미화한 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랬다. 바넘은 가정에 충실한 평범한 남자로 전락했고(악당조차 되지 못하다니!), 서커스 단원들은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떠맡고도 주변부로 밀려난 느낌이었다. 그에 비하면 <여인과 바다>는 상당히 균형있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과 바다>의 훌륭한 면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연과 조연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력, 화면에 담기 쉽지 않았을 수중 촬영신과 바다 촬영신의 자연스럽고 유려한 영상미, 고증을 통해 재현한 실제 역사적 장면들(영화 끝부분에 실제 트루디 애덜의 자료 영상이 나온다. 비교해 보시라.) 등등 스토리 외적인 부분에도 장점이 많지만, 내 관심사는 항상 스토리에 있으므로 이 지면에서는 스토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일단 전체적 플롯은 전기영화 중 영웅물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반영웅물 같은 구조를 따를 수는 없으니까 그건 뭐,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게 좀 애매하다. 여성 인물의 전기물일 때는 영웅물이라기엔 뭔가 찜찜하면서, 로맨스물은 분명한 모호한 위치에 머물 위험이 있다.(후술하는 <코코 샤넬>이나 <라 비앙 로즈>와 비교해 보라.)  


트루디 애덜은 장애(영화 속 시간상에서는 아직 장애 수준은 아니다.)와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핸디캡이 없는 백인-남성-비장애인조차 쉽게 해내지 못한 업적을 세운 인물인데, 장애에 대해서라면 또 하나의 비교 대상이 있다. 장애 여성의 스토리를 다루었던 <소울 서퍼>의 경우에 주인공의 신체적 장애와 신앙적 극복 같은 면에 초점을 두어 개인 차원의 고난 극복기를 감상적으로 다룬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여인과 바다>는 인물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시대와 사회로까지 확장시켰다.


<여인과 바다>의 스토리에서 매우 세심하게 신경 썼다고 느꼈던 부분은 조연들을 처리한 방식이었다. 주연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조연들을 거칠게 분류하면 조력자와 적대자로 양분할 수 있을 텐데, 영화 속의 많은 인물이 조력자와 적대자를 유연하게 오고 가는 '입체적 인물'이었다. 그 중에 '미스터 울프'만이 평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적대자는 스토리 내부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트루디의 조력자, 즉 코치이다. 트루디를 돕는 역할에 배치되어있는 최악의 적대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외에 트루디의 엄마인 거트루트 애덜, 언니인 매그 애덜, 아버지인 헨리 애덜 같은 인물은 대단히 입체적이어서 결코 조력자나 적대자, 어느 한 단면만을 지니지 않았다. 세 역할의 인물 중 누구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그들의 바스트샷이 잔상으로 남아 있다.


엄마 역할의 배우 제닛 하인은 스토리상 대문자 T의 성격인 듯한 거트루트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위기와 절망, 환희 앞에서 미묘한 표정 변화만 보이던 그 특유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 앞에 방패막이로 서서 딸들을 지켜주는 최대 조력자가 대문자T 성격이라니! 트루디가 최초로 우승하는 장면에서 거트루트가 짓는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또한 언니 메그와 트루디의 관계는 말 그대로 '자매애'가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진정한 연대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투샷만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긴 대사 따위는 필요없었다.


의외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아버지 헨리였다. 이 서사가 가부장적 억압이 엄청났던 시대의 여성 도전 서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 헨리와 트루디는 적대적 관계일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이 영화를 만약에 아버지와 딸의 대립으로만 채웠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버지가 마냥 적대적이기만 한 환경에서 여성들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 개인사적 불행을 딛고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거대한 무언가를 뚫고 나가는 이야기라면, 보수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는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 억압의 밑바탕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깔고 있어야 한다. '미스터 울프' 같이 여성을 자기 돈벌이나 개인적 커리어의 발받침 정도로 쓰려는 남자 아래에서 위대한 여성이 탄생하기란 어렵다. 그런 관계 설정이라면 그 여자는 아마도 어린 시절 집을 떠나 다른 조력자를 만나야 할 것이다.


미스터 울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지 않나? 남자들 사이의 영웅이 되고 싶지만, 거기서는 불러주지 않으니 여성들을 깔고 앉아 적당히 챙길 것만 챙기고, 주어진 것에 불평이나 하는 못난 남자들 말이다. 여성을 '관리'하는 일이라니, 자신이 맡기에는 너무 초라한 임무라고 생각하지먄, 그마저 남성들 사이의 비즈니스로 따낸 성과라고 믿기에 오직 다른 남자들 눈치 보는 일에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 말이다. 여성을 '관리'한다는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위해서, 조력자가 되려는 남성은 얼마나 귀한가?


남성 조력자 캐릭터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영화 <코코 샤넬>이라든지 <라 비앙 로즈>(에디뜨 피아프의 삶을 다룬 영화)에서의 재현은 찜찜한 점이 있었다. 그 위대한 여성들은 사랑을 전제로 도움을 받고, 사랑의 완성에 실패한 탓에 사회적 성공을 '대신' 쟁취한다. 코코 샤넬의 실제 평판이 상당히 '야심만만한' 캐릭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재현 방식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성의 도전과 성취는 어째서 그런 식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극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니, 다큐멘터리조차 당대 소비자들의 가치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난 시대의 여성 전기 영화는 분명 그 시대 영상 소비자들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그때조차 나는 불만이었고, 지금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여인과 바다>는 한 발 나아간 작품임에 틀림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성 영웅의 탄생에는 '자매애'가 필수적이다. 진정한 여성 영웅은 여성들의 지지로 탄생한다. 사람(Man)들이 여성에게 악세서리 같은 가십이나 바라고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지 말라고 응원해줄 존재는 자매들이다. 그러나 어떤 극영화도 개연성을 무시하고 스토리를 수는 없다. 여성 영웅의 탄생에 기여한 것이 자매들뿐이라는 설정은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조력자 빌 버저스 캐릭터도 훌륭했다. 아, 이 부분은 스포일러 중에서도 스포일러라 발설하기가 힘들다. 언젠가 이 영화가 더 이상 신작이 아닐 때, <여인과 바다>의 대본상에서 가장 훌륭했던 점으로 빌 버저스를 꼽는 글을 쓰고 싶다. 왜 그런지는 영화를 보면 안다.


입이 간지러워 하나만 말하자면, 버저스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영웅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광대를 원한다는 것을. 그는 트루디나 흑인 벤지와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진짜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 못하는 세계, 모든 것을 세속적 기준으로 재단하는 세계와 대면하며 느끼는 고독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인물에 대한 것만 풀어놨는데도 3천 자를 훌쩍 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장점만 더 언급하고 끝내야겠다. 영화가 <G.I.제인>처럼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육체적 성평등을 주장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트루디 애덜의 육체성은 실화가 훨씬 놀라운데, 영화는 조금 더 톤다운된 어조로 조근조근 말한다. 그게 너무 좋았다. 호들갑 떨지 않는 어조라서.


영화는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트루디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트루디가 변화시킨 세계에서 폭발시켰다. 영화는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트루디를 둘러싼 사람들, 트루디가 성공하기를 원하고, 트루디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람들, 그게 눈물겨웠다. 영화 중반에 트루디가 파리 올림픽에서 돌아올 때의 장면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겹치면서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다. 끝내 트루디가 성취한 것은 적대적이었던 세계 전체를 자신의 조력자로 만드는 것이었구나.


2번 봤는데, 또 볼 것 같다. 이 영화를 내가 꼽는 "남성 감독이 제대로 만든 페미니즘 영화 목록"에 올렸다. 곁에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델마와 루이스>가 나란히 놓여 있다.


Ain't We Got Fun. 재밌지 않나요?


한동안 페기 리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닐 것 같다. 영화 속의 트루디처럼.




https://youtu.be/Gl_LxjQ_Luo?si=CAiw6Xyvso1FYlJ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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