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애라 Jul 03. 2024

<인사이드 아웃 2>를 보고(스포 주의)

읽고 쓰다

※ 이 글은 영화를 보기 전의 정보 수집용으로 부적합함을 미리 공지함.


<인사이드 아웃 2>를 개봉하자마자 극장에 가서 보았다. 아이들이 영화 개봉만을 손꼽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6학년 아들은 학교에서 부상으로 문화상품권을 타자 영화관람비로 쓰겠다며 나에게 맡겨두기까지 했다. 개봉 날짜가 나오기도 전에 미리 영화값을 지불해둔 셈이었다. 그만큼 아이들은 이 영화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영화에 만족한 듯했다. 매우 흡족한 듯 신나게 영화관을 나왔다. 그러나 어른인 나는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기대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1편이 워낙에 수작이어서 그런 것 같다. 2편이 나빴던 것도 아니니까. 졸음이 온다거나 딴 생각이 들거나 하지 않았고, '아, 저건 아닌데...' 하고 머리를 흔드는 일도 없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보러 가서는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중간에 잠도 왔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휴대폰도 봤다. 극장임을 상기하고 얼른 끄긴 했지만...)


그렇지만 1편보다 어쩐지,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약간, 그러니까 아주아주 약간 허전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엇때문일까?


생각해 보니 2편에는 '슬픔'이 크지 않았다. 영화 안에 슬픔이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나의 감정를 말하는 것이다. 1편에서는 울컥하는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대표적으로 빙봉이 죽을 때 그랬고, 라일리가 가출했을 때, 가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미네소타에서의 추억-유년의 깜찍한 아이가 해맑게 웃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가 그랬다.


상대적으로 2편의 라일리가 겪는 고난들은 슬픔보다는 씁쓸함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라일리가 울음을 터뜨릴 때조차 같이 울기보다는 그저 라일리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은 정도의 기분이 들었다. 사춘기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곧 지나갈 거야. 이런 말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라일리의 사춘기 고민은 보편적이고도 섬세했으며, 매우 잘 고증된 십대의 심리를 담고 있었다. 1편의 아이 심리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세심하게 '그들'의 편에 서서 다루었다는 느낌이다. 라일리의 마음 속 세계 또한 훨씬 풍성해졌다. 1편의 유년기 세계도 9년 전 당시에 "와, 인간의 마음속을 저렇게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성의 세계로 만들어내다니!"하고 감탄했는데, 2편의 사춘기와 비교하면 단순하고 귀엽게 느껴졌다(물론 제작진이 그 부분을 의도했겠지). 신념의 나무나 비아냥 계속, 의식의 흐름 강, 기억의 저편 등등, 지리적 세계가 확장된 스케일이 거의 <반지의 제왕> 급이었다.


그런데 라일리의 내면의 확장된 세계에 비해 라일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고난'의 크기가 1편에 비해 소품처럼 느껴졌다. 비극의 스케일이 일상 소극 정도로 줄었다는 느낌이었다. 라일리가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긴 하지만, 관객으로서 "와, 내가 다 부끄럽네." 할 정도의 사건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스포일러라 자세히는 말 못함.) 그 사건은 후에 라일리가 폭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도구처럼 보였다.


나는 그 대목에서 라일리가 좀 더 근원적으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다른 어떤 것을 목격했어도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애초에 갈등과 고난의 시작이 '친구'와 '또래집단', 그들만의 사회를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이었으니 그 부분으로 좀 더 파고들어가도 좋지 않았을까? 결말에서 라일리가 우정을 회복하는 장면에서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터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의 구덩이' 부분이 그다지 깊지 않아서가 아닐까? 구덩이가 깊어야 빠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도 큰데 말이다.


내 경험과 비교해 보면 라일리는 참으로 평탄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새로운 친구 무리에 끼기 위해 나는 얼마나 얼간이 짓들을 많이 했던가. 라일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만한 일로 훗날에 이불 킥이나 하겠나... 괜찮다. 뭐. 그 정도는.'


1편은 그와 다르게 나를 완전히 몰입시켰다. 라일리는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나 역시 7살, 학교 입학 직전 해에 살던 곳을 떠나 이사를 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졸업 때까지 자기 집에 데리고 있어 주겠다고(아마 두어 달 뒤가 졸업이었나 보다) 할 정도로 나를 귀여워 했던 탓에 이사 후 매일 밤 꿈을 꾸었다. 나는 꿈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고 울었다. 아이들에게 이사는 큰 재앙이다. 모든 것이 바뀐다.


얼마 전에 주디스 해리스의 『양육가설』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에서 해리스는 부모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양육 가설들을 반박하고, 그야말로 가설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집단사회화' 개념을 주장한다. 인간은 아이든 어른이든 집단의 범주를 설정하면 그 안에서만 유효한 적응 방식을 고수할 뿐이며, 범주가 바뀌면 완전히 다른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혹은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른에게 가정 밖의 세상이 별개로 존재하듯, 아이에게도 가정 밖의 세상이 별도로 존재한다. 그 둘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될 수 있지만, 전혀 연결점이 없는 세계가 될 수도 있고, 때로 가정 밖의 세계가 가정으로 침입해 들어오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어느 하나만으로 한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 인간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아빠와 엄마로만 구성된 2인 집단보다는 훨씬 큰 규모의 집단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동의'를 외칠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경험 또한 주디스 해리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디스 해리스는 어린 시절 이사를 통해 성격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선머슴아 같고 모험을 좋아하던 리더에서 한순간에 왕따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사 전의 내가 딱히 좋은 조건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라일리의 미네소타처럼 엄마와 아빠와 얼음판에서 하키를 치는 행복한 추억 같은 것은 없었다. 달동네 마을의 비탈막과 화물차를 몰고 집을 떠나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 두 아이만 남겨두고 화장품을 팔기 위해 집을 나서는 엄마, 주인집의 눈치를 보며 갇혀 있어야 하는 단칸방 뿐이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 유치원 선생님은 대단히 훌륭한 분이었던 것 같다. 유치원은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휴일에도 셔터 문을 반쯤 열어두었던 것이 기억난다. 허리를 굽혀 셔터 아래로 들어가면 선생님이 화내거나 야단치는 법 없이 아이들을 반겨주었다. 갈 곳 없는 가난한 동네의 아이들이 거기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내가 나이에 비해 영리하고 애교스럽게 군다고 칭찬해주곤 했다. 재롱잔치 사진에 남겨진 그 시절의 나를 보면 시킨 동작을 뻣뻣이 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시선을 옮겨가며 고개짓을 요란하게 해대고 있다. 표정에 애교가 철철 흐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아주 짧은 시기의 내 모습이다.


이사한 후에 나는 성격이 변했다. 나는 좀 더 소극적이고 나서기 싫어하며 굼뜬 아이가 되었다. 학교에 입학한 후에 증상은 더 심해졌는데, 내게 거의 장애에 가까운 수준의 근시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부터 그 성격은 고착되어 버렸다. 1학년 담임이 촌지를 받기 위해 부모님게 그 사실을 뒤늦게 알렸던 것이다.


나는 입학 후 한동안 손바닥이 벌겋게 부르트도록 맞고 오기 일쑤였고, 촌지 봉투를 가지고 엄마가 학교를 방문해서야 담임은 "아이가 숙제를 해오지 않고 시킨 것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눈이 나쁜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담임은 나를 뒷줄에 앉혀두었는데, 엄마가 방문한 후에야 맨 앞자리로 바꾸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자라는 내내 엄마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 들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이전의 이야기이다.


담임이 나를 그렇게 대해서인지 아이들도 나를 괴롭혔다. 특히 남자 짝은 정도가 심하게 괴롭혔는데, 당시에는 괴로움을 부모님이나 어른에게 호소하면 "네가 좋아서 그러는 것."이라거나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러는 거니 반응을 하지 마라."는 괴이한 충고를 듣던 때였다. 이상하게 담임이 때린 일은 엄마의 증언으로만 기억에 남아있지만, 또래가 괴롭힌 일은 누가 되풀이해 상기시키지 않았는데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주디스 해리스에 따르면 나의 이런 선택적 기억력 또한 또래가 인간의 사회화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이사하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선생님 옆에서 조금 더 있었다면, 내가 존중받는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또래들과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면, 나는 다른 아이로 자랐을까?


1편의 라일리가 집 밖의 큰 세계를 통째로 잃고도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 슬픔을 꾹꾹 누르다가 결국 폭발하는 것과 달리 2편의 라일리는 좀 더 영악하게 군다. 절친들과 다른 학교에 진학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무리에 끼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으려고 한다. 노력이 처절하게 보이긴 하지만, 단지 우상인 선배와 비슷해려는 동기에서, 정말 그 선배의 무리에 끼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동들이라는 점에서 몰입도가 크지는 않았다.(스포라 말을 못하지만, 진짜 끼려고 했다면 막내다운 행동을 했어야 했다. 아무리 어리고 아무리 사춘기의 정신상태라도 무리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 정도는 눈치 깔 줄 안다. 그리고 대개 훗날의 진정한 이불킥은 그런 부분에서 나온다. 무리의 기대를 자진해서 과도하게, 오버해서 맞춰주다가 폭망하는 거다. 무리에서 특출나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행동보다 그게 진정 쪽팔린 기억으로 남는다.)


내 생각에 스토리가 보완되려면 라일리가 옛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알콩달콩한 것을 보며 질투했어야 했다. 소외감을 느꼈어야 했다. 그래야 혼자되지 않으려는 '불안'이 가중되지 않았을까? 옛친구들에게서 벽을 느끼고 튕겨 나가 새 친구 쪽으로 가지만, 거기도 끼기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면?


1편에서 기쁨이가 슬픔이를 제어실에서 추방해 버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했던 것처럼 2편에서는 새 멤버에게 소외감을 잔뜩 안겨줬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후회했다면? 불안이가 원년 감정 멤버들에게서 소외감을 느껴도 좋았을 것이다. 쟤들 사이에 내가 낄 수는 없겠구나. 그러면 내가 주도해야지. 내가 주도하면 나는 소외되지 않을 거야. 이때 바깥에서는 라일리가 친구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반전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불안이 주도하는 구도가 개연성 있게 완성되지 않았을까?


이쪽도 저쪽도 끼지 못한다는 소외감, 그런 게 좀 더 두드러졌다면 아마 나는 2편의 사춘기 감정에 좀 더 몰입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게 부족했다. 대신 더 정교해지고 더 광대해진 내면 세계, 더 다양하고 더 많은 감정 인물들, 더 빠른 전개와 더 커진 액션, 더 많은 대사량, 더 화려해진 볼거리에 치중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어쩐지 영화관을 나올 때는 1편에서 슬픔이가 계기판을 만지던 결말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극장에 걸려 있는 작품에게 내가 너무 인정머리 없이 구는 것 같다. 물론 1편보다 좋았던 점도 있었다. 유머는 2편이 1편보다 낫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건 내 유머 취향이 '병맛', 이른 바 사춘기 유머 취향과 가까워서 그런 모양이다. 6학년 아들과 조석의 만화를 보며 함께 웃고,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되풀이 해 보며 낄낄거리니까, 2편에 등장하는 병맛 같은 개그들이 취저였을 수밖에.


관대하게 생각하면, 6학년 아들의 옆구리를 치며 낄낄 웃는 대목들만으로도 좋은 영화였다. 아직 사춘기가 제대로 오지 않은 내 아들은 '저런 게 사춘기구나' 하면서 보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그 아이에게 진짜 사춘기가 오면 라일리보다 큰 고난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딱 라일리만큼 불안해하고, 딱 라일리만큼 위기에 처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끝이라서 말씀 드리는 건데, 스포가 딱히 없는 일기 같은 글에 '스포 주의'를 붙인 까닭은... 글쎄, 뭘까요?)

 


<언급된 책>

주디스 리치 해리스, 최수근 번역,『양육가설』, 이김 출판사. 2017. (2022년 개정판 출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