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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예술에 대한 환상들

읽고 쓰다 - 많은 텍스트를 경유해 닿은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씨씨>

by 서애라
GDP라는 형태로 성장을 계산하는 데 이용되는 국가회계체계는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을 소비하면, 그것은 생산의 경계 바깥에 있게 되므로, 사실상 전혀 생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 생산이라는 경계는, 그 적용범위에서 재생하거나 재생될 수 있는 부분을 생산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 산물이다.
- 반다나 시바 & 마리아 미즈, 『에코페미니즘』, 15-16쪽


에코페미니즘에서 지적하는 현재 자본주의 성과 측정의 문제는 낸시 폴브레 같은 돌봄 경제 연구자들도 지적한 바가 있다. 환경문제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이해하지 않고 풀어나갈 수 없듯이 돌봄 문제와 성차별 문제도 자본주의 체제를 경유하지 않고 풀어나갈 수가 없다.


마르스크주의 페미니즘이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도 자본주의 체계의 계급 안에서 해방을 상상할 때 그러하다.


영화 <풀타임>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서로 다른 계급의 여성들 이야기이다. 하나는 중심지로 들어가려는 여성이다. 교육을 받았고 야망이 있으며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자본(주택 및 직장)은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극빈층 여성이다. 집도 직업도 교육 자본도 없다. 굶주림과 성매매로까지 내몰린다.


두 여성 집단은 자기 계급에서 바로 위로 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 욕망에는 맹점이 있다. 지금의 체계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바닥에 깔려야만 한다. 제3세계 여성을 불러들여 염가에 돌봄과 양육 노동을 떠맡기고 있는 홍콩이나 싱가폴의 사례가 그러하다. 자유 시장주의는 항상 '더 싼 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권한다. 그러나 그 권유는 '착취'의 가속화와 영구화라는 칼을 숨긴 채로 내미는 달콤한 유혹이다. 가난한 나라가 없어지는 순간, 싱가폴과 홍콩의 전문직 여성들은 '여자의 일'이라고 규정된 굴레 속으로 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해방됐다고 믿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실을 코뚜레를 꿴 채로 자기 줄을 다른 소의 코에 걸어둔 상태이다. 끌려다니는 것은 저 소이지 내가 아니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 있다.




언젠가 "AI가 똑똑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여성이 똑똑해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공포와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에는 허구성이 내재해 있다. 그 허구성이 마치 AI가 여성과 같은 지위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인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둘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묘하게 둘은 어떤 허구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 허구성의 원리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져 있지만 말이다.


AI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또한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엇인가 생산한다는 환상을 선사하며, 마찬가지로 소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반면 여성은 실질적으로 생산 주체이며 동시에 소비 주체이지만, 마치 그 모든 것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착각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여성은 실질 경제에 참여한 적 없다는 환상을 깨부수는 책으로는 경향신문 젠더 기획팀이 취재하고 기록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가 있다. 명함이 없다는 말이 매우 상징적이다. 이들은 항상 실질 경제에 참여했음에도 그 역할을 축소 당하고 공로를 치하받는 일에서 배제되어 왔다.


이러한 일들의 근본에는 '가정주부 이데올로기'가 한몫을 한다. 여성들을 둘로 나누어서 한쪽에는 전문직 종사자를 놓고 다른 쪽에는 가정주부를 놓는 식이다. 그리고 가정주부들은 실질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한다. 그러나 그런 이분법은 현실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해석해서 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안경일 뿐이다.


이 이데올로기 안경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강화시킨다. 무급 가사노동과 무급 돌봄노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이익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을 무급으로 처리하거나 '무급'이라는 그림자 영역의 존재 때문에 책정 가능한 최저가로 해결한다. 이 노동의 영역들은 조금만 비싸져도 불평이 터져나온다.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그 이유는 그 일들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반대다. 거의 모두에게 꼭 필요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반면에 AI 산업의 대부분은 생존이 아니라 효율성을 위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AI가 필요하다. 아주 소수의 분야를 빼고는 거의가 그렇다. 그러나 이 산업은 인류의 문명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AI가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환상은 특정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불려준다. 그게 중요하다.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 가격은 '제대로' 책정되어야 하며, 대중화하기 위해 기꺼이 자본이 투입되고 있다. 가격을 떨어뜨리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유용성을 논하자면 대체 무엇이 '유용'의 기준인지부터 논해야 한다. 그러니 '재미'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말하자면 AI는 '백인 남성'의 사냥꾼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현현이다. 이 기계는 계속 진보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환경을 착취한다.


우리는 계급화된 설국열차를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환상 속에서 끝없이 순환 트랙을 돌고 있다. 그러는 동안 환경은 파괴된다. 열차 이외에 어떤 것도 살아있지 않은 폐허를 보게 될 것이다. 설국열차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착취 모티브로 읽는 영화평은 무수하다. 그러나 그 안에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설국열차의 앞칸이 먹고 입는 것들은 그 칸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뒤칸에서 모두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앞칸에서는 '우리가' 생산하고 있다는 환상을 계속 생산할 뿐이다. 사실상 진짜 동력은 따로 있다. 진짜 생산은 열차 밖에서 이루어진다. 열차는 미개발 지역을 황폐화시키며 전진한다. 그러므로 더이상 황폐화시킬 땅이 남아있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애초에 균형 같은 것 없었다. 새로운 약탈지의 발견만이 있었을 뿐.


설국열차의 앞칸에서 생산되기를 독려받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가축처럼 생산도구화된 여성들이 그러한 압력을 받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 문제를 여성문제와 연결 짓지 않는다면 나사가 하나 빠진 것이다. 여성들은 진짜 생산을 담당하고도 생산 주체로 취급받지 못하는 설국열차 속의 유령들이다.


사이버펑크 이미지처럼 생명이 모두 파괴되고 나서도 빌딩과 시멘트와 전기 구조물로 이루어진 도시 자본주의의 상징들은 살아 있을까? 폐허 속에서 열차는 계속 달릴 수 있을까? 글쎄,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도시 이미지를 외삽하여 확장한 것이 사이버펑크 이미지라면, 거기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공 조형물로 가득한 도시는 농촌과 미개발 지역의 착취로 일군 것이라는 점이다. 자연과 농촌이 사라지면 도시의 불빛도 죽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이 전멸한 디스토피아가 된 세계에서 인공구조물로 된 도시만 불을 환하게 밝힌 이미지는 허구이다.




육군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강압과 무력만으로는 인도의 설계자들이 그리고 있는 규모의 사회적 개조를 수행하거나 관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빈민에 대한 전쟁을 벌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나머지 우리 중산층, 사무직 노동자, 지식인들, 즉 "여론 형성자들"을 상대하려면 "인지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반드시 기업 자선사업이라는 신묘한 기예에 의존해야 한다.
- 아룬다티 로이, 『자본주의』, 34쪽.


아룬다티 로이는 문학축제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축제의 후원사의 입맛에 맞춘 친정부적 발언만을 용감한 척 내지르는 행태를 고발한다. 그들은 진짜 죽어가는 사람들과 진짜 폭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자유발언에서 나오는 말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발언'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돈의 눈치를 보고 있다. 아룬다티 로이마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 죄인들 중 누가 처음으로 돌을 던질 것인가? 기업형 출판사들이 주는 인세로 먹고사는 나는 아니다.
-아룬다티 로이, 『자본주의』, 37쪽.


예술은 돈과 무관한 척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계에서 돈과 무관한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시장경제에 편입되지 못하는 가내 수공예품들의 운명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내가 생산하고 내가 써버리면 그것은 예술품의 위치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마치 내가 농사 지은 곡식으로 내가 밥을 해먹고 끝내버리는 것과 같다. 내가 낳은 아이를 내가 돌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된다. 예술이 비정치적이라는 말은 허구이다. 그것은 AI가 생산에 관여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것이나 여성들이 비생산의 영역에 있다고 취급되는 것만큼이나 허구이다. '관조적' 시선이라는 말조차도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어떤 식으로 '관찰', '관조'하느냐는 누가 그 예술의 향유자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관조자는 한쪽의 쾌락이 다른쪽의 고통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방조한다. 왜냐하면 한쪽의 쾌락을 키울수록 '돈'이 되기 때문이며, 다른쪽의 고통은 전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소홀하게 취급되는 고통은 대개가 약자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 약자들이란 뻔히 보이는 약자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고통은 돈이 된다. 은밀하게 숨겨지는 고통들은 그런 것이다. '사랑'의 '대상'으로 찬미받는 것들. 수동성, 순종, 복종, 추종, 기꺼이 행하는 강자를 위한 희생. 남성의 발기를 위해 헌신하는 여성의 몸.


"빛났던" 광야에서의 짧은 기간이 지나자 인도의 가난은 이국적 정체성이 되어 예술로 귀환했고, <슬럼독 밀리어네어> 같은 영화들이 그 선봉에 섰다. 빈민을 그린, 그들의 놀라운 정신력과 회복력을 그린 이야기들에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서사적 긴장과 지역색을 보태주는 조무래기들만 있을 뿐이다. 이런 작품들의 창작자들은 초기 인류학자들의 후예들이다. "현장에서"의 작업으로, 미지의 세계로 용감한 여정을 떠나 찬양과 명예를 얻었던 이들. 하지만 부자들이 그런 식으로 관찰대상이 되는 일은 드물다.
-아룬다티 로이,『자본주의』, 64~65쪽.


명예와 돈을 취하기 위해 누구를 관찰 대상으로 정하고, 누군가에게 보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 그건 탐욕에 들떠서 예술을 빙자한 돈놀이(명예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먼저 정하는 일이다. 불행을 다루는 기술이 예술이라면, 나보다 힘없는 사람을 재현대상으로 다루려는 의지는 예술의 탈을 쓴 권력욕이다.




최근에 권김현영이 쓴 첫 소설을 사서 읽었다. 이 소설의 창작 맥락에는 지난해에 젊은 여성들을 분노하게 했던 문학계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권김현영은 그 사건에 있어서 왜 끼어야 하는지, 또는 왜 끼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는 존재로 애매하게 자리했었다. 본인이 직접 등판해 그 황당함을 호소하는데 아마 이 방식은 누군가가 그 이름을 들먹이며 원했던 효과는 아닐 것이다. 권김현영이 밝히는 소감은 그 반대에 가깝다.


처음 이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심정은 이 상황을 최대한 아이러니한 농담으로 만들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전 연인의 이름을 그대로 써놓고는 성이 다르니까 너랑 상관이 없다고 하고, 그 성씨의 조합은 부모성함께쓰기를 하는 나, 권김현영으로부터 따왔지만, 권김현영은 하나의 기호일 뿐 실제의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농담없이 설명할 방법을 아시는 분?
-권김현영,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씨씨』, 작가의 말 첫부분, 72쪽.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의 울컥함을 느꼈다. "남자는 숨만 쉬어도 1인칭으로 살 수 있는 조건"에서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참조로 끼워져 있는 씨씨가 "드디어 화"를 내는 부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던 남자는 사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 부분.


얼굴도 이름도 다 아니까. 여자의 신상정보는 단지 얼굴과 이름만으로도 특유의 착취 경제 속에서 유통되는 재화가 되니까. 그걸로 충분했고, 나중에 얼마든지 다시 꺼내서 쓸 수 있으니까.
- 권김현영,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씨씨』, 71쪽.


로맨스의 기만성은 여기에 있다. 기울어진 채로 0점이 맞춰진 저울에서 손만 놓는다고 평평해지지는 않는다. 현실 로맨스에서 남성의 그런 제스처는 '난 상관하지 않았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 존재한다. 난 이 체계와 상관이 없어. 난 체제 밖에 존재하는 남자야. 그러나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공표함으로써 정치적 행위를 한다. 사실은 연결되어 있지만 아닌 척할 수도 있고, 같은 비중으로 연결된 존재들 중 하나만 크게 부각해서 외칠 수도 있다. "난 여기 소속이야. 이쪽 색깔이라고!"


그러므로 아무것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감수성을 마주하면 물어야 한다. 속지 않기 위해서.


누구를 위한 센티멘털인가?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이 아름다움은 누구의 주머니로 돈이 흘러들게 하는가? 누가 아름다움으로 대상화되기 위해 벌거벗고 서서 무급노동을 하고 있는가?



<참고문헌>

마리아 미즈, 최재인 옮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2022.

마리아 미즈&반다나 시바, 손덕수&이난아 옮김, 『에코페미니즘』, 창비, 2020.

낸시 폴브레, 윤자영 옮김, 『보이지 않는 가슴』, 또하나의문화, 2007.

낸시 폴브레, 윤자영 옮김,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에디토리얼, 2023.

아룬다티 로이, 김지선 옮김,『자본주의:유렁 이야기』, 문학동네, 2018.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휴머니스트, 2022.

권김현영,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씨씨』, 위즈덤하우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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