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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Dec 26. 2024

꿈 일기

살고 쓰다

지난 며칠간은 군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들은 나를 무섭게 하기도 했고 슬프게 하기도 했다. 총과 칼을 든 모습이 아니라 신발로만 등장하기도 했다. 군인인 줄 모르고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쩐지 사람이 너무 슬퍼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닌 일상 이야기들이 이렇게 슬플 수가 있나. 그러다가 무심코 아래를 보니 바짓자락 아래로 군화코가 비죽 나와 있었다. 나는 요즘의 군화를 모르는데, 어떻게 군화라고 알아봤을까? 꿈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알람을 듣고 꿈에서 깼다.


오늘처음으로 군인이 나오지 않는 꿈을 꾸었는데 군인들이 나오는 꿈보다 슬픈 꿈이다.


꿈에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찾아온 것인지 우연히 만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내가 기억하는 꿈의 시작은 그가 들떠서 영화사로부터 자신의 시나리오에 대한 피드백이 왔다고 내게 자랑하는 장면이다.

그는 영화사가(혹은 에이전시 혹은 영화 전문 출판사일 수도 있다. 꿈이라 분명치 않다.) 시나리오를 보완하면 좋을 방법을 답장으로 보내왔다면서 내게 그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답신 메일의 내용은 영어 원서로 된 작법서에 기초적으로 지켜야 할 내용을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것이었다. 그것도 타이프를 친 게 아니라 페이지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그것이 긍정적 피드백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기 시나리오에서 해당 부분을 찾았다며 그곳만 고치면 금세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난처해서 할 말을 계속 우물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확연히 감격에 겨워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 살아온 인생사를 주절거리며 내비치기도 했다. 가난하고 힘겨웠던 과거사와 현재를 정리되지 않은 형태로 툭툭 내비쳤다. 그는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한이 있었다. 돈을 벌어야 해서 빨리 사회에 나왔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올바르지 못하지만, 꿈이 깬 후에 기억나는 그의 모습은 심란하다. 깡마른 몸, 헝클어진 곱슬머리, 희끗하게 솟아오르는 새치들, 어둡고 거친 피부결, 누가 뒤쫓아 오는 듯이 급한 말투와 정제되지 않은 육체 노동자의 구어 특성들, 검은 마카로 지워진 듯한 그의 옷차림...

옷차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가장 슬프다. 누군가 내게 그의 인상착의를 물으면 눈과 코와 입은 말할 수 있지만 옷차림에 대해서라면 난처해할 것이다. "그냥 무난한 했어요." 라는 말만 되풀이하지 않을까? 개성이 없던 그의 옷차림은 '낡고 초라하다'는 느낌만을 강하게 풍겼다.


그에 비해 그의 이목구비에는 고집이 있었다. 무산자로 태어나 잔인한 세상에서 악착 같이 버텨내기 위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던 방어막이 아집의 형태가 되어 들러붙어 있었다. 나도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에 내 얼굴을 쓸어보았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은 뻔했다. 이미 굳건한 자기 확신에 내가 퍼부어주는 한 바가지의 칭찬을 더 끼얹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난처했다. 그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굳이 나를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게 진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일 텐데, 내 말은 모두 믿기 위해서일 텐데. 나는 계속 그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 그게, 하고 말을 흐리면서, 기쁘겠어요, 그쵸, 기분 좋은 일이죠, 하고 애매한 추임새를 넣으면서.


헛된 희망이 나중에 불러올 더 큰 상처와 좌절을 생각하면 이대로 대화를 끝내서는 안 된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서 돌아섰다가 다시 그의 테이블로 갔다.


"이 업계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도전자들의 0.1프로도 안 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작은 희망에 취해 큰 꿈에 부풀었다가 나가 떨어졌어요. 좋은 스토리,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은 정해진 게 아니예요. 세상은 그 잣대를 수시로 바꾸거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글의 절대적 우수성을 믿었다가 바닥으로 추락해왔는지 몰라요. 그런 게 없다는 사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진실 앞에서 불안과 우울을 얻어 가기도 해요. 그건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계속 글을 쓰시든 안 쓰시든 말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마음이 오염되어 끝내는 버려야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업계 현실에 대해서 미리 조사해 보셨으면 해요. 기분 좋으신데 초 치는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 말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너도 무명의 작가니까, 너는 나를 질투하는구나. 내가 작은 것을 일구었다 자랑하니 그걸 깎아내리고 싶은 거구나.' 그런 마음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를 연민하고 있을 뿐인데, 그를 내 처지와 같이 보고 있을 뿐인데, 그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서먹한 기운이 흘렀다. 그래서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꿈에서 깨고 나서 후회했다. 거짓이라도 좋은 말을 해줄 걸 그랬나?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지 않나? 출판사에서 작법서를 사진으로 찍어보낸 것은 단지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지만 그에게 좋은 말을 해줬어야 한다는 죄책감에 온갖 구실을 만들어 붙였다. 학력도 짧은 사람에게 영문 원서를 찍어서 보 이유에 대해서는 애써 모르고 싶다. 그가 학력을 기재해서 자기소개를 보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마 그의 글에 그 자신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에게 하필이면 영문 원서로 된 작법서라니. 그건 상대를 테스트해 보려는 의도거나 더 심하게는 조롱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과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자꾸 죄책감 쪽으로 돌아앉는다.


좋은 말을 해줬어야 했어. 희망을 붓는 말을.


가능성 없는 희망 때문에 삶의 활력이 생기는 것이 뭐가 나쁠까? 훗날 그 들뜸 때문에, 허방을 깨닫고 추락한다고 해도, 한 번쯤 삶에서 그런 부양감을 느끼며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고만고만 살다 죽는 인생들이라면, 가짜라고 해도 기분이나마 높은 곳에 당도해 보는 것이 뭐가 나쁜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일 텐데. 그러다가 우울의 늪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때의 극복을 지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마지막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타인과의 우열을 생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기 자리가 너무 비루하고 비참하게 느껴져서 '위'에 있다고 믿는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저 나의 칭찬을 바란 것이 아니라, 나의 추앙을, 내가 기꺼이 그의 아래에 위치해 그를 우러러볼 것을 바랐던 것 아닐까? 나는 그의 그런 희망을 헛되다고 생각해 딱하게 바라본 것이 아닐까?


글의 세계에서 그런 희망은 헛된 망상이니까.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하니까. 위와 아래를 위치 지으려는 속내를 가지고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만남은 항상 실패할 테니까.


그가 적은 배움으로 육체 노동을 하며 당해온 설움들이 그를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 헤매게 했을 테지. 그래서 나는 한없이 슬퍼졌다.


꿈 속에서 만난 한 사람 때문에.

쓸데없이 긴 가방끈을 가진 여자인 나와 마주앉았던 몽당한 가방끈의 한 남자 때문에.

거울처럼 나를 반전시킨, 나와 너무나 닮은 사람 때문에.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마저 이 세계와 지나치게 닮아있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생활고를 비관한 일가족 사망사건 기사를 접했다. 그 정도로 어렵지 않은 내 처지와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동시에 나를 치고 지나갔다. 탄핵 정국에 나라 경제가 곤두박질 치고 있는데, 그 체감이 우리집 경제에까지 닿고 있다. 수입원들에 하나둘 타격이 생기고 있다. 좋아하는 글을 쓰며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 지출을 졸라매서 버텨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서로 만들고 있다.


꿈 속의 남자는 지금 스토리업계가 어렵다는 현실을 깨닫고 본업에 충실하러 갔을까? 아니면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1월 31일에 나도 무모한 도전을 시작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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