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찾아왔다
겨울창가에서 봄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설이 다 가 왔다"
떡국 상을 차리러
"아들딸들이 세배하러 오고 있네요"
"자 오늘은 딸이 사다 준 핑크보라옷으로 갈아입으셔야지"
아파트의 베란다가 뜰앞마당이 된 핑크보라의 할머니와
간병인의 대화 속에서 따스한 봄햇살이 노래하며 속삭이었다
아들 딸이 찾아오는 구정날이다
세배를 받기 위해
예쁘게 차려입고 오늘도 자식을 기다리며 환희 웃고 있는
라일락 할머니는 창가에 앉아서 아기처럼 웃고 있었다
구정이 오면
봄꽃구경 하러 다니듯
행복했던 옛 단층양옥집을 추억하며
주택의 뜰 앞마당 대신 아파트의 베란다를 즐겨 찾는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을 남편으로 착각하며 퇴근길의 지아비를 향하여 베란다로 외출하는 버릇이 생겼다
혼자의 넋두리에 늘 익숙해져 있는 라일락할머니에게
구정 전 날 딸이 사다준
핑크보라 경량 패딩점프를 입혀드리자 연신 곱다며 방글방글 웃으신다
손거울을 비추어 보이자
블라우스를 입고 모자를 쓰고 싶으시단다
간병인이 백세를 바라보는 핑크보라 할머니에게 여고시절교가를 불러드렸다
라일락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다
10대 여학생이 되어
여고시절의 학교교가를 부르고 계셨다
"띵똥~*
오늘따라 유난히도 핑크보라가 잘 어울렸다
그녀는 설날 이 설인 줄 도 잘 모 르며
'라일락꽃 보라 핑크 공주'로 변신하며 작은 소녀가 되었다
소녀의 기도 피아노 곡을 들려드리니까
학창 시절에 배웠던 무용시간이 생각나셨나 보다
발레의 기본 손동작을 본능적으로 하셨다
설날 아침, 남쪽 마을에서는
때 이른 봄이 찾아왔다 엄마의 베란다에도
핑크보라의 봄, 꽃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난초화분들이 핑크보라 꽃송이들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라일락할머니는 핑크색을 보며 혼잣말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솔밭에서 뛰어놀다 쓰러져 죽을 뻔했던 아이가 누구였더라"
"그 아이는 하마터면 그날따라 돌멩이에 맞아서 이마가
찢어져 피를 많이 흘렸는다던데 명이 길어서인지
안 죽고 살아났다는구나 "
오늘도 추억의 지평선 저 너머에는 꽃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봄이 오는 어머니의 베란다에서
난초 화분의 꽃대가 올라오며
방긋이 웃는다
유난히도
색에 민감했던 라일락 할머니의 젊었던 시절
한때는
도시의 번화가에서 여성들의 패션을
주도하며 살아오셨던 역사를 지닌 핑크보라의 어머니였다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구정날
창가의 난들들도 서로 경쟁하듯
하얀 핑크보라와 연둣빛 꽃대를 들어 내 보이며
그들의 이야기꽃을 피운다
# 홍영주의 그림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