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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음악과 공간 잇기, <버텨내고 존재하기>

권철 <버텨내고 존재하기> 리뷰

by 이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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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개관, 올해로 90주년을 맞은 광주극장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인디 뮤지션들과 광주극장, 사람과 공간, 그야말로 버텨내고 존재해 온 이들의 만남이다. 아직까지 손간판을 고수하고, 일제 강점기 영화 검열의 흔적인 임검석이 남아있는 광주극장에는 여러 시간과 기억,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공간 여기저기서 뮤지션들은 각자가 서 있을 자리를 찾는다. 8팀의 뮤지션은 ‘버텨내고 존재하기’라는 키워드에 대해 그들이 가장 자신 있는 방식인 음악으로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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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발견은 불이었어 저 해 보다 뜨거운 불


김일두는 당신이라는 사람 덕분에 버텨내고 존재할 수 있는 거라 말한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저 해보다 ‘뜨거운 불’ 같은 존재다. 기타를 연주하는 김일두의 뒤로 창문 가득 들어찬 빛이 보인다. 선글라스는 주로 강렬한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지만, 그는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선글라스를 쓴 사람 같다. 카메라는 정면을 응시하는 김일두의 모습을 롱숏으로 잡는다. 그의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하나의 식물만이 남는다. 빛이 있어 살아갈 수 있는 식물처럼, 그도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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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생을 함께할 확률이 있는 그런 사람


김사월은 '확률’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은 작은 확률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주 작은 확률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The Green Ray)>에서 영제를 따왔다는 그의 노래 ‘확률(Ray)’은 사랑 노래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작은 확률은 우리를 괴롭게 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계속 꿈꾸게 하고, 버티게 하고, 존재하게 한다. 확률의 다른 이름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꿈꾸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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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 없는 듯이 어르고 달래주네 살아있기 좋은 날


곽푸른하늘은 오늘이 ‘살아있기 좋은 날’이라 말한다. ‘살아있기 좋은 날’이라는 건 특별한 게 아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의문을 품고 자책하던 그 어느 날에도, 내게 힘을 주는 네가 있어 살만한 거다. 너는 사람이 아니라 한 편의 영화,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다. 곽푸른하늘은 당신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 줄 노래를 조심스럽게 건넨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 매표소에 건넨 음료수 한 캔처럼. 노래를 마친 곽푸른하늘은 복도 의자에 앉아 그 음료수를 마신다. 살아있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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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 정글을 떠나 살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은 악어새가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이다. '악어떼'가 가득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택한 건 순응이다. 버텨내고 존재하려고 안간힘 쓰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지만,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딘가에 오래 버텨내고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에 힘을 빼고, 그저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은 이름만큼이나 유쾌하게 그들만의 생존 방식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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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지는 좋을 때보다 힘들고, 슬프고, 우울하고, 외로울 때 음악에게 엄청난 힘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자원 역시 힘들 때 마음을 잡아준 존재가 기타, 음악이었다고 대답한다. 고상지와 이자원이 연주하는 '마지막 만담'은 말로 관객들을 웃기는 게 직업인 만담가가 그 일에 실패했을 때 느끼는 자괴감과 괴로움을 가사 한 줄 없이 표현한다. 아코디언과 기타로만 연주되는 음악은 말로 표현 안 되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음악이라는 이자원의 말을 상기시킨다. 두 사람은 만담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평생 느껴야 할 필연적인 감정들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혹은 무뎌지지 않으려고 음악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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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품 안에서 너는 절대 부서질 일이 없을 거야


스스로를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한 정우는 희망과 기쁨에 대해 노래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고, 그저 주저앉아 울고 싶을 때, 절망에 빠진 순간으로부터 누군가를 구원해 줄 노래. 나는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철의 삶'은 정우에게 있어 고백이다. 그 고백은 남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구원하는 힘을 가진다. 그가 버텨내고 존재할 수 있는 건 이 노래를 누군가에게 건넬,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순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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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 모두들 살아간다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더 이자람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노래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을 만드는 행위가 그저 즐겁다는 그는 판소리 아티스트와 포크싱어,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상이 검게 변해도, 다정한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도 모두들 살아간다고 말하는 노래 '산다'는,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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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축제가 끝나가도 인생의 무대는 계속되고


<버텨내고 존재하기>의 호스트 최고은은 주소영과 함께, 광주극장 미술실에서 '축제'를 노래한다. 93년도부터 광주극장에서 영화간판을 그려왔다는 박태규 화백은, 우리나라의 마지막 영화간판장이다. 그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광주극장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런 공간의 존재에서 버텨내고 존재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두 사람과 그림을 그리는 박태규 화백의 모습이 하나의 프레임에 잡힌다. 분절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은, 사실 바로 옆 이어진 하나의 공간에 존재한다.


뮤지션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공연을 했지만, 모두 광주극장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존재했다. 최고은과 감독 권철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그들을 <버텨내고 존재하기>라는 하나의 영화로 잇는다. 그렇게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극장에서 상영되며 광주극장과 다른 지역의 극장을 이어주고,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 광주극장과 극장이라는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을 이어주며, 결국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어코 이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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