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자리만 걸어도 자란다
최종결과 불합격으로
......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날의 행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여긴 좀 낫다. 불합격 메일을 다 보내주다니. 씁쓸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거절을 해주니 더 할 말도 없었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눈에 띄는 곳, 그나마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자리에 벌써 열 손가락은 넘게 지원했는데, 여태 면접 보러 오라는 데 한 군데가 없다. 내가 너무 눈이 높았던 걸까.
나는 오랜 시간 ‘이력서에 없는 삶’을 살았다. 아침마다 아이를 깨우고,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다시 해가 저물도록 반복되는 하루. 육아라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역량을 요구했다. 문제 해결, 감정 노동, 대화 온도 조절, 위기 대응, 수면 부족 속 의사 결정까지. 게다가 이 일에는 주말도, 칭찬도, 월급도 없으며, 회의도, 명함도 없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을 때, 사람들은 내가 경력단절 아줌마가 되어 아예 처음 이력서를 쓰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서러웠다. 내 지난 시간이 의미 없는 공백처럼 취급되는 것 같아서. 더 서러운 건, 그 생각을 세상이 아니라 정작 나부터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력서를 열 때마다, 빈 구멍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칸이 이렇게 많은 건지.
2013~2023
육아로 감정 컨트롤 스킬 극상승,
냉장고 속 재료로 식사 메뉴 정하기 스킬업.
다중 업무 처리, 감정 노동, 위기 대응, 휴식 없는 피로 관리 마스터.
2024~2025
취업 시뮬레이션 17회, 실제 성공 0회.
이런 걸 적을 순 없지 않냐고. 나중에는 차라리 비워두는 게 더 능력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10여 년을 쉬고도 내가 다시 일할 수 있을까.'
'내가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일까'
지원한 곳에서 거절당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그럴 때마다 위축되고, 쪼그라들어 한없이 작아졌다. 대답은 늘 같았다.
모르겠다.
한동안은 그 물음에 대답조차 하기 싫었다. 그저 멍하니 하루를 넘기고 또 넘기며, 또 다른 지원서를 쓰고, 또다시 거절당하면서.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나를 그냥 좀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안되는데, 나 쉽게 안 그만두네?'
'뭐지. 나 왜 끈질긴 거지.'
예전 같았으면 진즉 포기하고, 징징대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의외였다. 개운하게 한숨 잤다고, 달달한 조각 케이크 하나 먹었다고 다시 힘이 솟았다. 심지어 수십 번 이력서를 쓰고 고쳐 쓰다 보니, 이제는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잡혔다.
그렇게 조금씩 용기를 모았다. 작은 성공, 사소한 성취 하나에도 숨을 고르고, 실패 속에서도 잃지 않는 내 의지를 붙들었다.
버티는 게 그냥 시간이 지나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 칸도 나아가지 않은 것 같던 시간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보이지 않는 힘이 내 안에서 쌓이고 있었다. 일을 멈춘 지난 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작고 사소해 보였던 경험들조차, 시간이 지나니 비로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커리어를 쌓아온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나 역시, 내게도, 남은 것이 있었다. 마치 꽁꽁 숨겨둔 비상금을 발견한 듯, 마음 한켠이 든든해졌다. 세상이, 드디어 조금은 내 편이 된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내 성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면접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간 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필해 보기로 했다. 내 경력이 직선처럼 이어지지는 않아도, 나만의 모양으로 분명 연결되어 있다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시간을 증명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