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자리만 걸어도 자란다
세상이 아무리 날 ‘경력단절’ 프레임을 씌워대도, 내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지난 10여 년은 공백이 아닌 내 인생의 복합장르였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지독하게 냉정했다. 열정만으로는 면접의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경험이 없다’는 이유는 참으로 간단명료했고, ‘다시 시작하기엔 좀 늦지 않았냐’라는 시선은 더 단단했다.
그런 와중에 요양보호사 교육원 강사 공고를 접했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지만,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교직이수를 하며 보건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시간과, 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서 있던 순간들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 자격증을 몇 개 더 얻고, 돌봄에 대한 흥미로 요양보호사 자격증 또한 취득했다. 그건 단순한 도전이 아니었다. 나는 돌봄이라는 현장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이미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래. 이만하면 완전히 처음은 아니다. 나는 서둘러 이력서를 넣었다. 프리랜서라도 좋았다. 작은 발자국이라도 내면, 그다음은 더 잘 보일 테니까. 어쩐지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이틀, 스스로도 민망할 만큼 코평수만 넓어진 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잠깐의 기대가 무너지고 곧 익숙한 상상이 고개를 들었다. 내 이력서가 단 몇 줄만 읽힌 채 메일함 저 밑바닥에 깔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기다림은 점점 더 나를 작아지게 했다. 이미 여러 번 두드린 문이었다. 그런데 이번마저 침묵이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갑자기 그다음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럼 그냥 내가 그 문을 열자.
문이 열리길 기다리기엔 나는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다음날, 나는 교육원으로 향했다. 칠판, 책상, 흩어진 교구들이 나를 모르는 듯 무심히 서 있었다. 사무실 내 시선들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는 듯했고, 뱃속에서는 나비가 아니라 대형 드론 하나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 떨림을 꿀떡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작아지지 않는다.
“저, 이번에 강사 지원한 간호사입니다.
강사 경험은 없지만 보건교사 2급 자격증도 있고, 가르치는 일에는 자신 있습니다.
시범 강의를 요청하신다면 보여드릴 수 있어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말을 하는 내내 떨렸다.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한동안 현장을 떠나 있었지만, 열정만큼은 여전히 일하는 중이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결과가 어찌 되든 이제 후회는 없었다. 마음만은 이미 충분히 자유로웠다. 문을 나서자, 내내 긴장감에 눌려 있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나, 아직 할 수 있구나.'
그 짧은 확신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강사로서의 시간이 시작됐다. 그토록 기다리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첫 수업 날 아침, 칠판 앞에 서자 긴장이 온몸을 에워쌌다. 학생들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심장이 두 배로 뛰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어깨를 펴고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감 있는 척이라도 해야, 진짜 그렇게 된다.
‘척’은 조금은 덜 완성된 나에게 누군가 후 하고 불어준 용기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속 주문을 되뇌며 첫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척’이었다. 하지만 한 문장, 두 문장,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손을 들고 질문하는 학생,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하는 학생, 그리고 어쩌다 마주친 짧은 미소 하나. 그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고 여유가 생겼다. 어느새 조금은 진짜 강사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수업이 끝나자 한 학생이 말했다.
“오늘 수업 재미있었어요. 다음 주에도 오시죠?”
그 한마디에, 8시간 내내 수업하며 쌓인 피로와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마치 ”왜 이제야 오셨어요?”하고 묻는 느낌이었다. 지난 시간의 시행착오를 한꺼번에 보상받은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깊고도 묘한, 기분 좋은 만족감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나는 비로소 첫걸음을 떼고 ‘일'을 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간의 수많은 거절은 더 간절해져야 한다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고. 내가 만약, 교육원으로 직접 찾아가지 않았다면, 얌전히 연락을 기다리다 '안 되나 보다'하고 포기했다면, 그랬다면 이 자리도 그동안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내게 아직 어울리는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을 망설이는지 모른다. 그 망설임이, ‘지금은 아니야’, ‘연락해 볼까 말까’ 하는 주저함이 모여 결국 수많은 기회들을 그냥 지나치게 만든다. 그리고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되짚으며, 또 한 번 놓친 기회를 돌리려 애쓰며 살아간다.
오랜 경력단절 끝에도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간절함은 단순히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결심,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나에게 그것은, 다시 내 일을 시작하고야 말겠다는 절실함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무기였다.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지니 핑계는 힘을 잃었다. 그러니 나처럼 지독히 간절한 이가 어딘가에 또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 오래지 않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를 만나게 될 거라고. 기다림을 넘어서는 간절함을 놓지 않는 한 말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리기’에 소비하며 살지 말자. 그렇게 잠자코 있기엔, 우리는 여전히 현장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나도 출근했다, 오늘.
‘출근’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따뜻하게 들릴 줄이야. 편의점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그리고 그 얼굴 너머로 나는 새로 시작되는 시간을 보았다. 긴 기다림과 좌절을 지나 마침내 오늘, 나는 다시 출근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