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한가운데에서, 동주를 떠올리다
가끔은 글을 쓰다가 길을 잃는다.
문장을 몇 줄 적어 내려가다 멈추고, 커서를 깜빡이게 둔 채 한참을 앉아 있기도 한다.
왜 쓰는지, 잘 가고 있는지, 이 문장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는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럴 때 문득 영화〈동주〉가 떠오른다.
윤동주 시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지금의 나처럼 잠시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시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삶 전체가 흔들렸던 사람.
그의 시대는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시를 쓴다는 건 죄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그의 〈참회록〉을 다시 펼쳐본다.
읽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조용해진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이 문장을 읽고 있으면,
부끄러움마저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외면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시〉를 다시 읽을 때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풀린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문장은 다짐이면서도 위로처럼 다가온다.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살지 못했어도,
글을 잘 쓰지 못했어도,
그저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만 남아 있다면
아직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윤동주 시인은 끝내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누군가의 마음을 천천히 치유하고 있다.
나처럼 글을 쓰다 방황하는 사람에게도,
말없이 어깨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나는 그 시들을 읽으며
‘잘 써야겠다’는 생각 대신
‘계속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방황하는 시간도 글의 일부일 수 있고,
멈춰 서 있는 날도 삶의 문장일 수 있다는 걸
윤동주의 시가 조용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쓴다.
완벽하지 않아도, 확신이 없어도.
윤동주 시인이 그랬듯
나 역시 부끄러움을 안고
하루의 문장을 적어 내려간다.
치유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한 편의 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회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