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27세 전 기획자의 일본 워킹홀리데이 기록
계기
2년 반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나는 지쳐있었다.
그만두기 전 나는 내 일이 너무 즐거웠다. 2년 동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살 정도로 내 일에 자부심도 있었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믿고 일하며 스스로가 발전해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즐거웠다.
하지만 변곡점은 고통으로부터 시작되듯이 믿고 따르던 팀장이 그만두고 새로 구한 팀장과는 이래저래 맞춰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직장생활 이래 처음으로 인간관계로 힘들어했던 것 같다. 기어도 보고, 속내를 털어놔도 보고, 잘 보이려고 안 하던 야근도 하고 해 볼 건 다 해봤던 것 같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달 만에 살이 4키로 빠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고, 그만두기 전엔 회사 문턱까지만 와도 숨이 막혔다.
그래도 버티려고 했지만,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당일 오전 사직서를 받아 바로 제출했다. 그날 밤에 마신 맥주의 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것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워홀을 준비했다(?) 쵸큼 우울하게 시작했지만, 이것을 위한 어그로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준비했는지 풀어볼까 한다.
준비
결과만 얘기하자면 두 번째 도전에 붙었다. 1분기에 신청했을 때 당연히 한 번에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며 오만이며 나는 바보다. 결과 발표가 난 날 바로 왜 떨어졌는지 생각을 해봤다.
1. 일본어 자격증이 없으며, 일본어 습득에 대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에 대한 서술이 없음
: 일본어 실력을 증명할 가장 깔끔한 방법은 일본어 자격증(JLPT, JPT)인데, 만약 이 친구들이 없으면 일본어를 어떻게 습득해 왔는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의 서술이 필요하다. 서술은 이유서나 계획서에 적으면 된다. 추가로 고등학교 때 제 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으면 성적증명서를 학원을 수강 중이면 수강증을 책으로 공부했으면 책 사진이나 공부한 내용 등을 첨부하면 좋다.
2. 이유서와 계획서의 연관성이 부족함
: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유서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일본에 흥미가 생긴 계기며 만약 워홀을 가게 되면 애니메이션 연구를 하겠다.'라고 썼다면, 계획서엔 분기별로 어떤 애니메이션을 연구할 건지를 쓰는 게 좋다. 이유서와 계획서를 한 세트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3. 세상 사람들 모두 쓸법한 이유서와 계획서
: '어려서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가면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일상을 지내고 싶다.' 이런 식으로 아무 맥락이 없는 글을 썼었다. 그래서 계획서 또한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은 계획들을 적어냈다. 2번이랑 연결되는 얘기기도 하지만, 연관성도 물론 있어야 하고 덧붙여 가독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걸 확인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유와 계획을 보니 하나라도 눈에 특이하게 띌만한 게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이 부분은 내가 나이가 많아서 떨어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여 더 공들인 것도 있음)
이렇듯 생각보다 한 번에 합격하는 게 쉽진 않았다. 나이도 나이인지라(만 18세~만 25세 제한이 있음, 하지만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다면 만 30세까지도 신청이 가능함) 더 쉽게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2분기까지만 딱 해보고 안 되면 이직 준비하자라고 결심하고 2분기를 준비했다.
1분기 준비한 짬바가 있어서 그런가 2분기는 수월하게 준비했다. 다른 자료들은 1분기 때와 똑같이 준비했고, 대신 이유서와 계획서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전과는 다르게 조금 더 체계적인 느낌으로 글을 짜봤다. 전과 차이점을 둔 부분들을 조금 설명하겠다.
1. 나만의 글쓰기
: 이유서와 계획서엔 딱 2개의 소재를 골자로 가지고 갔다. '하이쿠'와 '미스터리 소설'.
하이쿠는 예전에 봤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사귄 친구가 하이쿠에서 큰 상을 받은 걸 알게 된 후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하이쿠도 2편 정도 지어봤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넣었다. 하이쿠는 일본에서는 흔한 문학이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기 때문에 심사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스터리 소설은 어려서부터 일본 작가인 '온다리쿠'의 팬이었어서, 그걸 계기로 미스터리 소설을 엄청 읽었었다. 그리고 읽은 것에 그치지 않고 번역본이 아닌 일본 원어로 된 책을 사서 하나하나 해독해 가며 읽었었다. 그때는 워홀을 위해 읽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원어를 사서 공부하며 읽었다고 말로만 하면 안 믿을 것 같아서 이전에 읽을 때 찍어뒀던 작게 사진들도 첨부했었다.
이렇게 내 개인적인 경험들을 녹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 소재들을 이용해 나는 일본의 고유한 문학인 하이쿠를 일본을 직접 경험하면서 사계절을 담아낸 하이쿠를 지어보고 싶다는 식으로 적었고 추가로 교토를 배경으로 짧은 에세이나 소설을 적어보고 싶다고 적었다.
2. 주요 포인트에 폰트 굵기 강조하기
: 글은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쉽게 지친다. 소설처럼 정말 재밌지 않은 이상 이유서 2장, 계획서 2장 총 4장의 분량을 몇천 명의 글을 읽기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각 파트마다 '이것만 읽어도 괜찮다' 싶은 문장들에 볼드 처리를 했다. 그런 문장들이 눈을 사로잡아 궁금증을 유발하면 나머지 문장들도 자연스레 읽게 된다고 생각했다.(약간 직업병일 수도 있..)
3. 이것저것 찾아본 티 내기
: 계획서엔 실제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걸 적어뒀다. 나는 교토에서 벗어나서 다른 곳을 살아볼 생각은 없어서 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토에서 어떤 걸 어떻게 할지를 적었다. 하지만 늘 교토에서 같은 관광지만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각 계절별, 월별 행사나 축제를 찾아봤었다. 그리고 하이쿠와 글짓기로 연결 짓기 위해 거기서 느낀 걸 가지고 하이쿠나 글을 지어보겠는 식으로 계획을 적었다.
위 3가지를 전제로 이유서와 계획서를 열심히 적어봤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땐 한번 떨어졌던 아픔이 있어서 이를 갈고 준비했지만, 그게 재밌었던 것 같다. 그때의 심정은 '일본에 너무 가고 싶다..'가 아니라 '감히 날 떨어뜨리다니 어떻게든 붙어주지' 이게 지배적이었다. 역시 지랄 맞은 성격이 어디 안 간다.(헤!) 그래서 합격 발표가 나고 와 드디어 일본에 간다니! 이런 마음보다 이겼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리도 패배도 없는 싸움에서 혼자 이겨버렸다.
오늘은 일본으로 오게 된 계기와 서류 준비 과정을 살짝 담아봤다. 다음엔 여기 와서 어떤 우당탕탕후루가 있었는지 얘기해볼까 한다. 빠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