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보의 이중생활

제 I장 - 낮의 유예, 밤의 실행

by 홍다정

고등학생 시절, 내 별명은 ‘교실의 잠만보’였다.

1교시 시작종이 울리기도 전에, 내 고개는 이미 책상으로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교실은 배움의 성소였겠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유예의 공간’이었다.


나는 지독하게 잤다.

아침조회부터 점심시간까지,

심지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석식 시간, 복도를 지나던 교장 선생님이 나를 깨운 적이 있다.


“아침에도 자고 있던데…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주변에서는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내 생활은 정상과 조금 달랐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한번 나가면 밤이 뒤집혔다.


새벽 2시, 그때가 진짜 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깊이 잠든 시간, 나는 동대문 시장 바닥에 서 있었다. 쇼핑몰을 운영하던 언니를 돕기 위해 뛰어든 그곳은 야생과 같았다.

트럭 매연이 코를 찌르고, 상인들의 거친 고함이 귀를 때리고,

바닥엔 쌓인 옷보따리가 발끝을 간질였다.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 치열한 속도전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는 앳된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쁘띠 홍이요.”

“이거, 깔 별로 주세요.”


처음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색해 괜히 아는 척 전문 용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어린 나이 때문에 무시당할까 봐 세운 방어기제였다. 그때마다 언니는 무심하게 툭 던졌다.


“야, 괜히 그러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나는 말하는 대신 보는 법을 먼저 배웠다.

가게 앞에 서면 본능적으로 손이 먼저 나갔지만, 그럴 때마다 언니는 다시 경고했다.


“만지지 마. 눈으로 봐.”


그 짧은 문장은 내게 커다란 가르침이 되었다. 단순히 빨리 움직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어떤 옷이 내일의 거리를 점령할지,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 어디인지, 트렌드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눈으로 읽어내는 법을 체득해야 했다.


일이 끝나는 새벽 5시, 첫차에 몸을 싣고 언니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면, 창밖으론 교복 입은 학생들과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새벽의 열기는 여전히 몸에 감돌고 있는데 세상은 이미 정해진 궤도대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경계에서 나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시간이 촉박한 날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가 몇 시간이라도 쪽잠을 자고,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향했다. 불 꺼진 교실 뒷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면, 밤새 치열하게 살아낸 몸의 긴장이 풀리며 비로소 안온한 휴식이 찾아왔다.


남들이 단어를 외울 때, 나는 이미 반나절 치 노동과 관찰을 끝낸 상태였다.

그렇게 이어진 잠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었다. 내 감각을 날카롭게 만든 휴식이자,
밤새 치열하게 살아낸 하루의 유일한 안식이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나를 보며 종종 말했다.


“다정아, 너는 참 독특하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남들이 ‘독특하다’고 부르는 그 감각이, 내겐 이미 승부수였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길'이 내 길이 아닐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나만의 '필살기'가 통할 판을 찾는 것이라는 걸.


그 무렵,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패션으로 향했다. 어떤 옷이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지, 어떤 조합이 거리의 공기를 장악하는지 지켜보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없었다. 동대문 바닥에서 몸으로 익힌 트렌드와 세상을 관찰하는 눈은 이미 내 안에서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관심은 결국 ‘스타일리스트’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이어졌다.


나는 공부라는 정공법 대신, 내가 가진 현장의 감각이 온전히 대접받을 수 있는 무대를 선택하기로 했다. 성적은 잠시 내려놓고, 오직 100% 면접으로만 승부를 볼 수 있는 패션 관련 학과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남들이 문제집을 풀며 정답을 찾을 때, 나는 가위를 들고 잡지를 오려 붙이며 나만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블로그에 기록되어 있는 '2012년 대학교 입시자료로 사용한 포트폴리오.' 포스팅에서 가져온 자료 )


종이 위로 옮겨진 나의 감각들은 그 어떤 수학 공식보다 명확하고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면접장에 섰을 때, 나는 이상하리만큼 떨리지 않았다.


그곳은 시험지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동대문의 새벽 공기를 마시며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증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수석 합격, 그리고 장학금 100만 원.


소식을 들은 아빠는 허허 웃으며 말씀하셨다.


“쟤는 어디 가서도 굶어 죽진 않겠다 싶었는데… 대학을 돈 받고 가네.”


그때 확신했다. 공부 말고도 이기는 방법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합격은 끝이 아닌 새로운 질문의 시작이었다.

‘내가 가진 이 방식으로, 앞으로 무엇을 더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밤과 낮, 잠과 깨어 있음, 관찰과 실행.

이 모순의 시간 속에서 길러낸 감각이, 내일 마주할 세상을 헤쳐 나갈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