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경계를 넓히는 셔터 소리
“스무 살, 나는 교실이 아니라 거리에서 처음 인정받았다.”
수석 장학생이라는 타이틀보다 나를 설레게 한 것은 숨 막히도록 뜨겁고 치열한 거리의 공기였다.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가방 대신 카메라를 들고 신사동 가로수길로 향했다.
그 시절 가로수길은 ‘인플루언서’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대신 ‘페북스타’들과 막 피어나던 모델들의 행보가 곧 트렌드가 되던 황금기였다. 지금은 연예인이 된 안재현, 이선빈, 주우재부터 당시 여자들의 아이돌이었던 ‘87mm’의 김원중, 도상우, 강철웅. 그리고 ‘도수코’의 최소라, 여연희까지. 그들은 가로수길을 수놓던 가장 뜨거운 피사체들이었다.
나는 언니의 쇼핑몰에서 쓰던 묵직한 DSLR 카메라를 메고, 아침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쉼 없이 거리를 걸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 누구 하나 촬영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하면 벌꿀 아저씨처럼 집요하게 따라가 부탁했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그걸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밥 먹듯 출근해 모델들의 다양한 룩을 담자, 페이스북 페이지와 블로그 방문자 수는 하루 만 명을 가뿐히 넘겼다. 가로수길의 터줏대감 같은 베테랑 포토그래퍼들 사이에서도 나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처음엔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나는 먼저 눈을 맞추고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셔터를 눌렀다. 그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자 어느 날부턴가 그들이 나를 ‘동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촬영 자리에 자연스럽게 끼워주고, 농담을 건네며 웃어주던 순간, 나의 세계는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어느 순간, 떠오르는 신진 디자이너의 파티에 초대받고, 패션위크의 최전선에서 셔터를 누르는 화려한 나날이 이어졌다. https://blog.naver.com/dajung37/50191661707
매거진 ‘힙합퍼(HIPHOPER)’에서는 뉴발란스 모델로 잡지 한 페이지에 ‘포토그래퍼 홍다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어느덧 신인 모델들이 나를 찾아다니며 촬영을 부탁하기도 했다. 선배 포토그래퍼들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블로그에 사람이 많이 들어오냐?”라고 물을 때면, 그 어떤 칭찬보다 더 오래 남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넓어진 만큼 학교라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좁아졌다.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한 대가로 고립되기도 했지만, 나는 아프지 않았다. 이미 내 삶의 무게중심은 학교 밖, 저 넓은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화려함이 정점에 달할수록 내 안의 무언가는 조금씩 식어갔다. 내가 원하던 곳에 서 있었지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셔터 소리와 빠르게 소비되는 트렌드 속에서 나는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이미지를 기록하는 일을 넘어, 내 손끝으로 더 밀도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나는 휴학계를 냈고, 돌아올 날을 기약한 왕복 비행기 표를 손에 쥔 채 뉴욕으로 향했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머무는 기간 동안 뉴욕은 패션위크가 한창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곳에서 과감한 패션의 힙한 사람들을 마주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깨달았다. https://blog.naver.com/dajung37/220319894693
‘공간이 바뀌면 사람도, 세상도 완전히 바뀔 수 있겠구나.’
그 찰나의 깨달음은 나를 일본이라는 또 다른 실험실로 이끌었다. 뉴욕의 파괴적인 에너지와는 다른, 일본만의 정교하고 깊은 감각과 개성 넘치는 분위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뉴욕을 지나 도착한 일본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 그들의 옷, 태도, 분위기. 그 모든 것이 내가 알던 세계보다 훨씬 넓고 자유로웠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다른 나라에서 살면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두려움보다 기대가 더 컸다. 나는 휴학을 연장했고, 결국 ‘일본 워킹홀리데이’라는 선택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가로수길에서 아무 계획 없이 셔터를 누르던 그 무모한 시간이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포토그래퍼 활동을 접고 몇 년 후, 다시 찾은 가로수길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던 한 포토그래퍼를 만났다.
그는 옆 동료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친구가 바로 그 2세대 스트릿 포토그래퍼야.”
그 한마디에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맨몸으로 부딪히며 거절의 숲을 헤치던 스무 살의 내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내가 남긴 것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었다. 거리의 공기, 한 시대의 흐름, 그리고 무엇보다 뜨거웠던 나 자신의 기록이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내가 알던 세상은 끝나고 진짜 내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