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궁금해지는 삶을 선택했다

제13장 - 낭만은 일본에 두고 왔다

by 홍다정

[찰나의 행복, 그리고 파격적인 약속]

워킹홀리데이 1년. 누군가에게는 잠깐의 일탈이었겠지만, 내 인생의 방향을 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날, 점장님이 툭 던진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비자해줄게. 졸업하고 꼭 다시 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당연한 것들이 유료가 되던 겨울]

비행기 바퀴가 한국 땅에 닿는 순간, 바로 알았다.
낭만은 일본에 두고 왔다는 걸.


공항을 나서는 순간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통장은 비어 있었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취업비자’가 필요했고, 그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전공과 연결된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문제는, 나는 그 졸업장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거였다.

휴학을 하고 떠난 워킹홀리데이였으니까.


누구의 도움 없이 감당해야 하는 학비와 생활비. 그 무게가 어깨 위에 얹히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외벌이였고, 늘 힘들어 보이셨다. 그런데도 항상 우리를 먼저 챙기셨다.

그 옆에는, 조용하게 우리를 지켜주던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되던 해, 그 모든 지원이 한 번에 끊겼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버티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도 있었다.


사랑받고 자랐다는 건 내게 단단한 뿌리가 되었지만, 스무 살의 겨울은 혹독했다.

어제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유료 서비스로 바뀌는 순간, 세상은 차가운 숫자로 다가왔다.


미납 안내 문자가 오고 휴대폰이 먹통이 되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의 그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서러움보다는 '이제 내 몫이구나'라는 서늘한 해방감이 먼저였다.


그 이후로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스시집, 이자카야, 편의점, 호텔 연회장, 카페. 닥치는 대로 일했다.


쉽게 손을 벌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늦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은 내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복학을 미뤘다.

앞으로 가는 대신, 다시 뛸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모으기로 했다.



[멈춰 있는 시간의 틈, 유튜브]

그렇게 시작된 휴학 4년 차.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전, 잠깐 배스킨라빈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점장님이 나를 좋게 봐주셨는지, 워홀 중에도 가끔 연락을 주셨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연락을 주셨다.

덕분에 다시 그곳에서 일하게 됐다.


겉으로는 멈춰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친언니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야, 너 유튜브 해봐. 네 인생, 그 자체로 콘텐츠잖아.”


[화면 속의 나, 화면 밖의 불안]

브이로그는 나에게 새로운 전장이었다.

유튜브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끌렸다.

나는 원래, 시작은 쉽게 하지만 대충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관심이 생기면 끝을 봐야 했다.


아르바이트비를 탈탈 털어 당시 ‘백종원 카메라’로 불리던 빅시아 미니 X를 샀다.
편집 프로그램도 3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결제했다.


구독자 0명.

그래도 상관없었다.


밤을 새워가며 배우고, 하나씩 만들어갔다.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이 왔다.

5개월 만에 구독자 1만 명.

누군가 내 하루를 기다린다는 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오사카 여행 영상과 도쿄 여행 영상을 올리면서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대화하는 모습,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롭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시기에 구독자가 빠르게 늘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여행 콘텐츠를 해볼까?’ 그때였다. 코로나가 터졌다.

하늘길은 막혔지만, 멈추지 않았다. 여행 대신, 내 일상의 0부터 10까지를 기록했다.

그렇게 ‘일상 유튜버’가 되어갔다.


화면 속의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사람이었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복학을 미루면서 생긴 시간의 공백, 그리고 점점 늦어지고 있다는 불안.

괜찮은 척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계속 마음 한쪽이 걸려 있었다.

돌아갈 곳은 분명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사라진 목적지, 남은 건 생존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목적지’마저 사라졌다.


포에버 21의 파산.

도톤보리점 폐업.


내가 돌아가야 할 이유이자, 유일한 목표였던 곳이 하루아침에 증발했다.


방향도 같이 사라졌다.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채로, 나는 한국에서 다시 ‘생존’을 선택했다.


스타일리스트라는 꿈은 생존 앞에서 밀려났다.

패션 디자인은 내가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는 쪽을 선택했다. 판매였다.


비이커(BEAKER)에 입사했다.

그곳의 점장님은 삼성물산 최연소 점장이었다.


점점 이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단골이 생기고, 사람이 쌓이고, 생각보다 잘 맞았다.

“너 출근하는 날은 출근길에 콧노래가 나온다.”

매출이 올라가고 있었다.

“내 다음 자리는, 네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기대가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책임은 생각보다 무겁게 돌아왔다. 그날도 그랬다. 내 일이 아니었던 실수 하나가

결국 나에게 돌아왔다. 그동안 쌓아온 신뢰 사이를 비집고,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혔다.


“X발, 너는 그때 뭐 했냐.”


망설임은 없었다.


"그만두겠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내가 공들여 쌓아 온 매출과 신뢰는 리더의 기분 한 자락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때 나는 요리를 꿈꾼 것도 아니었고,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 속에서 내 감각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급여 인상과 사과가 뒤따랐지만, 소용없었다.

판매를 선택한 게 틀린 건 아니었지만, 존중 없는 공간에서 내 시간을 소모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그 일 이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기준으로 일을 고르게 됐다. 그래서 나왔다.


이상하게도, 미련은 없었다. 그 뒤로도 계속 움직였다. 분명 무언가를 쌓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휴학하지 않고 바로 복학했다면, 조금 더 빨리 졸업해서 조금 더 빨리 일본으로 돌아갔다면.

다시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여전히 패션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나쁜 삶은 아니었을 거다. 오히려 더 안정적이고,

덜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삶을 떠올리면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안정적일 수는 있었지만, 설레지 않는 삶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나는 ‘틀리지 않은 선택’이 아니라 ‘계속 궁금해지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선택이든 주저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삶보다 설레는 불안을 택했다.
지독한 슬럼프 끝에,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었다.

내 식탁 위, 작은 일본 음식 한 접시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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