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아래 선 초보 등반가

제19장 - 허락을 받으려 쓴 계획서가, 나를 설득하기까지

by 홍다정

[에베레스트 아래 선 초보 등반가]

자격증 네 개를 손에 쥐었다.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잘 해낸 결과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쁨은 짧았고 허무함은 길었다.


내가 꿈꾸는 일식의 세계는 마치 에베레스트산처럼 보였다.
그 아래 서 있는 나는 고작 작은 삽 하나 들고 있는 초보 등반가 같았다.


이걸로 정상에 오르겠다고?
이걸로 1등을 하겠다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증명할 길 없는 막막함.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서 있는 기분.

그래서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내가 가장 많이 흔들리고, 또 가장 많이 배워왔던 방식.

여행.

이번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영감을 쇼핑하던 욜로족의 반전]

나는 지독한 ‘짠순이’다.


쓸데없는 데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
대신, 쓸데 있다고 믿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다.


내 기준은 단순했다.

요리.

그리고 여행.


만들고, 보고, 느끼는 일. 그 앞에서는 계산기가 고장 난다.


한국에서는 물건 하나에도 계산기를 두드리던 내가, 여행지에만 서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갑을 연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뉴욕에서는 2주 만에 600만 원을 썼고, 일본에서는 한 번 다녀오는 데 300만 원을 태웠다.

모아둔 돈을 전부 써버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일하고, 다시 모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떠난다.


그건 낭비가 아니었다.

나는 그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어쩌면 경험을 사 모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오사카로 들어가 도쿄로 나오는 일정. 익숙한 루트, 익숙한 설렘.


그런데 신칸센을 예매하려던 새벽,

머릿속에서 갑자기 다른 계산이 시작됐다.


도쿄, 오사카…
아무리 아껴도 400만 원은 쓰겠지.

그런데. 내 통장엔 아직, 청년적금 6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400만 원 + 600만 원.

딱, 1,000만 원.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전혀 다른 문이 열렸다.


여행이 아니라—

유학을 갈 수 있겠는데?


[16만 원의 수수료와, 인생의 방향 전환]

다음 날 아침. 나는 망설이지 않고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수수료 16만 원.


예전의 나였다면 손이 떨렸을 금액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으니까.


새벽부터 ‘오유모(오사카 유학생 모임)’ 카페를 뒤지고, 어학교 사이트를 하나씩 열어보며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식탁에서, 나는 부모님께 말했다.


“나 유학 갈 거야.”


숟가락이 멈췄다. 아빠는 나를 보며 물었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유학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적금이랑 여행 자금 풀고, 가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버틸게.”


그리고, 한 가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는 작게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유튜브.


대단한 수익은 아니더라도, 낯선 땅에서 나를 완전히 고립시키지는 않을
작은 산소 호흡기 같은 존재. 그 미약한 확신 하나가, 이상하게도 나를 꽤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계획 없는 계획, 견문을 향한 투신]

아빠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가서 뭐 할 건데?”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결국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아무 계획도 없었다.


자격증 몇 장으로는 내 꿈이 너무 쉽게 끝나버릴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냥 직접 보고 싶었다. 진짜를.


“일단 갈게. 가서 뭐든 해볼게.”


짧은 대답.

아빠는 한숨처럼 말을 던졌다.

“됐다, 그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만 드셨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획서 써와.”


그 말은, 완전한 반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허락도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증명해 보라는 뜻에 가까웠다.


그날 아침, 밥을 먹고 나자마자 종이와 펜을 꺼냈다.


아빠를 설득해야 했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한 문장씩 써 내려갔다.


장황했다.

허락을 받기 위한 글이었으니까.

그런데 쓰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문장을 정리할수록, 내 마음이 선명해졌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준비하면, 나도 떳떳하게 내 꿈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글은 아빠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를 설득하는 글이라는 걸. 그 아침, 그 계획서 한 장은 단순한 허락 청원이 아니었다.

내 꿈의 윤곽을 처음으로 확인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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