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급식이 나오면 좋아하는 반찬과 싫어하는 반찬이 있었다. 좋아하는 반찬은 소시지, 싫어하는 반찬은 가지무침이다. 반찬이 나오면 먹는 방식이 있다.
첫째, 맛 없는 것부터 먹을 것.
둘째, 맛 있는 것은 여유있게 먹을 것.
사람마다 성향과 취향을 다르겠지만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코를 막고 가지무침부터 빠르게 해치우면 소시지를 마음껏 음미할 수 있다.
인생 혹은 성공을 어떤 부류로 봐야 할까. 빠르게 성취해야 하는 부류일까? 음미하고 즐거야 하는 부류일까. 정답은 정해져 있다. 사람은 빠르게 도달한 것에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감흥을 느끼지 않기 위해, 때로는 빠르게 해치우는 일도 한다. 코를 막고 재빨리 목구멍으로 가지무침을 넘기는 행위가 그런 일이었다. 슬픈 기억은 빠르게 지나가 버리기를 기대하고 행복한 순간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고로 속도라는 것은 '가치'에 반비례한다.
고급 와인을 먹는 방법은 코로 먼저 즐긴다. 입에 머물면서 공기와 섞어준다. 그것을 그제서야 삼킨다. 오래 머금으면 그 향을 더 즐길 수 있다. 반대로 쓰디쓴 싸구려 술은 단숨에 목구멍으로 밀어 삼켜킨다. 연인의 손이 닿으면 오랫동안 머물고 싶지만 개똥이 닿으면 빨리 털어 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다. 속도가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믿는 세상에 '기술'이 아닌 곳에서 '가치'가 만들어 질지 의문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시대다. 속도는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속도는 빨라질수록 시공간을 왜곡한다. 자신의 시간만 천천히 흐른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속도를 고정하면 시공간이 왜곡된다. 삶은 시공간을 영유하는 것이다. 해외에 살면서 굉장히 독특한 경험을 했다. '뉴질랜드'라는 곳은 '유학생', '현지인', '관광객' 섞여 있다. 교육과 관광을 업으로 삼는 국가답게 관광객과 유학생 현지인의 비율이 적당히 섞여 있다. 개중 여권을 보지 않고도 상대의 체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걷는 모습이다. 두리 번 거리며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는 쪽은 관광객 쪽이다. 아주 빠르게 앞만 보고 걸어가는 쪽은 현지인 쪽이고 그 중간 정도 되는 것이 유학생 쪽이다. 이 셋중 가장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는 쪽은 역시 가장 느린 쪽이다.
'빨리 걷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다.'는 명언은 중국 최고 부자 '마윈'이 한 말이라고 한다. 빨리 걷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바쁘다는 것 혹은 늦었다는 것. 걸음이 빠른 사람은 대게 다음 일정에 쫒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디어와 영감은 쫒기는 와중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돈'으로 환전하여 사용하는 '시간제 근로자'가 아니라면 빠르게 일처리를 하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맞다. 누군가는 최저임금을 벌기 위해 빠르게 이동하지만, 누군가는 바쁜 일은 피고용인에게 넘기고 가치있는 일을 한다. 실제로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다. 군입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병장과 이등병의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등병의 경우에는 무척 바쁘고 분주하지만 성과는 엉성하다. 반대로 병장은 무척 여유롭지만 성과는 완벽하다. 결과는 속도에 비례하지 않는다.
몇 년 전에는 '성격급한 부자'에 관한 책을 읽었다. 부자들은 다수 다혈절적이고 성격이 급한 편이라는 것이다. 꽤 부유한 몇 명을 함께 경험해 본 결과,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그들은 성격이 몹시 급하고 다혈절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한 없이 친절하다가 업무상 답답함이 느껴지면 '버럭'하고 화를 내곤 했다. 그들의 걸음거리가 어땠는지 특별하게 기억에 남진 않지만 분명한 건 성격 급한 부자들을 꽤 많이 봤다는 사실이다. 다만 성격이 급한 것과 '속도'와는 다르다. 실제로 그들은 바쁜 업무 중에도 개인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분을 키우거나 골프를 치거나 책을 읽는 등. 꽤 여유가 있어야만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즐겼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속도'가 아니라 '완급조절'인 것 처럼 보인다.
별 하나와 동그라미 하나를 빠르게 그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을 빠르게 그리기 위해 오른손과 왼손에 연필을 한 자루씩 쥔다면, 동시에 별과 동그라미를 그려 2배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아니다. 아마 별이나 동그라미 혹은 그 둘 다 엉망으로 그려 넣을 것이 뻔하다. 사실 별과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하나를 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다시 그리는 것이다.
대기만성형으로 유명한 유재석 님은 초보운전자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빠른 거에요."
그것은 역설적이지만 맞다. 때로는 빠르다고 생각한 길이 되려 돌아가는 길인 경우가 많다.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빠르고. 속도는 분명 가치와 반비례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