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여진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공격해 온다.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한다는 광해를 폐위시켜, 반정을 일으킨 '인조'에게 일어난 일이다. 지금에 와서야, '광해'의 중립외교를 '실리외교'라고 평가하지만 당시에는 아니다. 임진년에 파병까지 보내 준 '명'을 져버리고 오랑캐를 상대로 '중립외교'를 한다는 것은 당시 납득하기 힘든 의견이었다. 청과의 화친은 인조에게 반정의 명분이었다. 단순히 고리타분한 '사대부'들의 고집이 아니라, 정권 잡은 이들의 정치적 명분이었다. 병자호란은 어렇듯 단순히 여진에게 집밟힌 치옥의 역사가 아니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다.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난 시기, 그때는 누르하치가 명나라 푸순성을 함락시킨지 5년 뒤다. 본격적으로 청이 성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청 조차 명을 대체할 것이라 여기기 힘들 시기었다. 결과를 알고 보면 '명청교체기'의 조선 상황은 답답해 보인다. 소설과 영화에서 관객과 독자에게만 공개된 위기감을 주인공들이 모를 때, 독자와 관객은 불안과 긴박함을 느낀다. 그것을 서스펜스라고 부른다. 모든 걸 다 알고 볼 때는 조선의 상황이 무능하고 답답해 보이겠지만, 그것은 '미래'라는 결과를 알고 봤기 때문이다.
인조가 반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청의 영토는 조선보다 작고 척박했다. 여진이 조선을 공격해 오던 시기까지 명은 여전히 대륙 대부분을 지휘하는 폐권국이었다. 여진은 만주 일부에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점이다. 여진은 종종 반도로 내려와 해적질을 하거나 노략질을 하곤 했다. 조선인들에게 여진은 중원을 대체할 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는 조선에서는 '명청교체'를 생각해 볼 수 조차 없었다. 명이 청과 대등한 영토를 가진 시기는 병자호란이 10년도 지나서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각각 척화파와 주화파다. 청군과 화친을 맺어서는 안된다는 쪽과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쪽이다. 이 둘은 병자호란 뒤에 심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주화파 최명길은 당시 청군과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 그 또한 전란이 수습된 뒤에 심양으로 압송된 것은 아이러니 하다. 실제로 그가 심양으로 압송된 이유는 명과 내통했다는 명분에서다. 남한산성 안에서 최며길과 김상헌은 각자 다른 주장을 했지만 시대적으로, 둘 다 청이 명을 집어 삼킬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치 못한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는 원래 여기저기 배밭이 있던 조용한 농촌이었다. 이 지역은 비만 오면 침수되기 일수였다. 이 지역은 197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평당 300원하던 땅값은 1억으로 올랐다. 그것은 결과를 알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지, 실제로 그것을 모르던 시기에서는 나아가는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최명길은 화친을 말하고 김상헌은 그것을 반대한다. 척화 주장을 했던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의 대립은 갈등 속에 두 의견을 던지는 자아를 닮았다. 최명길이 청에 답서를 쓰며 홍타이지를 황제자고 칭하자 김상헌은 그 자리에서 국서를 북북 찢어버렸다. 이에 최명길은 말한다.
"대감은 국서를찢으시오. 나는 다시 쓰겠습니다. 찢는 사람도 필요하고 찢어진 국서를 다시 줍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서 그 어느 쪽도 선과 악이 아니고, 어느 쪽도 정의나 불의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가장 정치적인 말이다. 상대의 역할도, 자신의 역할도 모두 제 역할 일 뿐이다.
역사는 비극이고 치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가 남긴 것은 가치있다. 소설 '남한산성'은 '최명길'과 '김상헌'이 등장한다. 이 둘은 '인조'라는 임금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양쪽의 의견이 팽팽하다. 이쪽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이쪽이 맞고 저쪽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저쪽이 맞다. 살다보면 그런 상황은 종종 접한다. 어떤 쪽을 분명하게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일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맞고, 저렇게 보면 저것이 맞는 상황에서 자아가 힘겹게 갈등하는 일은 남한산성의 '인조'와 닮았다. 수학문제를 풀 때는 답지를 보아선 안 된다고 한다. 수학은 논리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논리란 사고와 추리 과정을 법칙적인 연관을 따라 끌어가는 일이다. 즉 답을 얻기 위해서는 법칙적 연관으로만 근거해야 한다. 다만 답을 알고 난 뒤 부터는 반대로 결과를 근거로 연관을 짜맞춘다. 고로 가장 비논리적인 과정을 학습한다.
조선시대 최악의 임금을 꼽으라면 대부분 '인조'와 '선조'를 꼽는다. 역사적으로 이들의 평가는 역시 좋지 못하다. 선조는 우유부단하고 겁 많고 질투심 많은 왕이라고 부른다. 인조 또한 우유부단하고 명분만 중요시 하는 인물로 여긴다. 다만 선조는 합리적인 성격이었고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인조 또한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임금이었다. 그는 백성과 사대부 모두가 비판하던 대규모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정권을 안정화 하는 유능한 왕이었다. 그런 성격은 역시 반정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선조와 인조의 평가는 박하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결과론적이다. 선조와 인조가 우유부단하고 빠르지 못한 판단력을 보인 이유는 실제 그들이 그랬기 때문이아니라, 그들이 시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답을 골라도 오답인 경우가 있다. 이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비슷한 문제가 나온다. '트롤리 딜레마(전차의 딜레마)'다. 선로에 5명의 사람이 묶여 있다. 전차가 직진을 하면 이 다섯은 죽는다. 다른 선로에는 1명의 사람이 묶여 있다. 전차의 방향을 바꾸면 한 명이 죽는다. 만약 선로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레버가 있다면 이 레버를 당겨야 하는가?
어떤 선택도 '최악'과 '차악'만 있을 뿐, '최선'의 선택은 없다. 우리에게 놓인 옵션은 그런 성격인 경우도 있다. 그것은 역사적인 혹은 경제적인 큰 흐름에 의해 달라진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던 수 만의 사람들은 모두 '비극'을 맞이 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와 별개다. 가치판단에 따라 평가는 다양해 질 수 있다. 다만, 시험에 놓인 이들은 시험에 놓여 보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박한 평가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인조'와 '선조'에 대해 평가하고 싶지 않다. '인간 이종'이라는 사람이 놓인 고뇌에 공감하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최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보면, 고립된 '남한산성' 속에서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 오락 가락 갈등하는 인간의 갈등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인조 1636년 그것은 '역사'의 순간을 이야기 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로인해 인간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이 떠오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