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죽어도 글은 죽지 않는다. 작가가 살인마가 된다해도 글은 살인마가 되지 않는다. 작가가 변절자가 돼도 글은 변절자가 되지 않는다. 글은 흔적이다. 사진처럼 과거와 순간을 담아 낼 뿐이지, 미래와 현재를 담아내진 않는다. 작품이 그렇다. 글 뿐 아니라 영화, 음악 모든 것이 그렇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여전히 유승준의 '비전'이다. MC몽의 '죽도록 사랑해'도 좋아한다. 여전히 유아인의 연기에 감탄하고 신정환의 예능감에 웃는다. 추억을 관통했던 연예인이나 작가가 구설수에 오르면 가슴이 두근 거린다. 그때 느꼈던 모든 감정까지 거짓이 되버리진 않을까. 물론 문제가 된 이들은 대중에 심판을 받고 사라져야 한다. 사회적으로 그것이 정화 작용임을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울림을 줬던 것들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나쁜 평화도 전쟁보다는 낫다' 누구의 말일까. 이 말은 때로는 맞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이 말은 '일당 이완용'이 했던 말이다.
권력에 의해 탄압 받는 사람을 향해 저항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참으세요"라고 말한 인물도 있다. '마더 테레사'다. 언제나 그를 수 없고, 언제나 맞을 수 없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깨달은 것은 사과가 뉴턴보다 나았기 때문이 아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번뜩인 것도 해골물이 원효대사보다 많이 배워서가 아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도 누군가는 슬픔을 느끼고,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군가는 쓸쓸함을 느낀다. 그러나 낙엽은 그냥 낙엽일 뿐이다. 낙엽을 보고 슬픔을 느꼈다고 세상 모든 낙엽이 슬픈 것은 아니다.
유승준의 '비전'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이고 싶은 그런 모습의 그 삶을 위하여."
노래를 불렀던 그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사는 지금도 나를 자극하기 충분하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가수 김건모는 '핑계'라는 곡을 발표했다. 아버지가 대중 가수의 음악 테이프를 구매하신 것은 내가 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LP판이 달린 커다란 오디오에 마이크를 연결해 주셨다. 창밖으로 감귤 나무가 무작위하게 서 있는 농장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핑계'를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무슨 사건인지 모른다. 연예계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렇다. 언젠가 '김건모'라는 가수가 언급됐다. 자유롭게 피아노를 치며 공연하는 그의 바로 10미터 앞에서 경호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아름다운 노래와 추억이 모두 부정되면 안된다. 그의 이름이 종종 나오면 가슴을 졸였지만 어쩐지 그의 음악을 들어도 되는 모양이다.
유희열이라는 가수의 음악을 지금도 종종 듣는다. 혜민 스님의 책을 여전히 소장하고 설민석 강사의 강연도 재밌다. 어쩌면 이런 문화 소비에 누군가는 일침을 할지 모른다. 취향은 그렇다. 개인의 취향은 집단의 가치판단에 의해 강제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로 작가가 누구냐, 가수가 누구냐, 출연인이 누구냐는 내게 중요치 않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얻었는지가 중요하다.
언급된 혹은 언급되지 않은 유명인들은 '범법' 혹은 '비도덕적' 잣대에 지탄 받기도 한다. 다만 어쩌다 사회가 한번의 관용도 용서하지 않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 번의 실수도 가차없이 걸러지는 무정한 것이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사회보장제도'는 '실업, 장애, 질병, 은퇴, 출산, 빈곤, 사망, 양육' 등의 다양한 환경에서 어느정도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은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등 44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기업가 정신 지수에서 9위라는 높은 랭크를 가진 나라다. 창업 실패에 대해 가장 겁을 내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는 '정부정책의 적절성'이다. 원래 창의성은 포용성에서 나온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부유한 나라 일수록 포용성이 높다. 포용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창의성이 높다. 경제에서는 그처럼 혁신적인 나라가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포용적이지 않다. OECD의 사회통합지수의 사회적 부분에서 대한민국은 30위권으로 최하위다.
실수하면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 나라. 그럴수록 문화소비자로써의 폭은 점차 줄어든다. 문화는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된다. 문화 소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생산자 또한 감소한다는 것을 뜻 한다. 잘못한 유명인을 한 번 더 봐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번의 실수로 아오지 탄광을 보낸다는 닫힌 사회와는 조금 다른 사회를 살고 싶다는 약간의 바램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