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
쿠바 아바나 근처의 해안 마을에 사는 늙은 어부의 이야기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간 아무것도 낚지 못한다. 그러나 노인은 먼 바다로 나가 거대 청새치를 만난다. 청새치와의 사투 끝에 노인은 기어코 그것과의 만남을 목전에 둔다. 다만 청새치를 노리는 상어들로 인해 노인은 또다른 사투를 벌인다. 사투 중 청새치는 반동강이 나고 다시 살점이 뜯기며 점차 앙상해진다. 노인은 앙상한 고기만 항구로 실고 돌아온다. 노인은 항구로 돌아 온 뒤 읖조린다.
"그놈들한테 내가 졌어. 내가 완전히 진거야."
이에 노인이 고기에게 진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고쳐 말한다.
"그래. 내가 진 건 그 뒤였어."
헤밍웨이는 자신의 작품에 상징주의를 지나치게 적용하는 것을 달가워 하진 않았지만 노인과 바다는 결국 나에게도 무언가의 메시지를 남겼다.
어느 누가 물었다.
"지금하고 있는 일은 재미있나요?"
어쩐지 외부적으로 보기에 일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에 답했다.
"'재미'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재미'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하느냐고 물었다. 목적을 물었다. 왜 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없다.
햄스터를 키우는 케이지에 쳇바퀴를 넣어두면 햄스터는 미친 듯이 쳇바퀴를 돈다. 아무리 달려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그 의미없는 행동을 햄스터는 미친 듯이 한다.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는 것을 재미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햄스터는 쳇바퀴를 돈다. 척추동물 포식자는 종종 배를 채우는 목적이 아닌 이유로 수많은 동물을 죽인다. 예전 캐나다 북부에 늑대무리는 갓 태어난 순록 새끼 서른 네마리를 물어 죽였다. 늑대가 순록 새끼를 물어죽인 것에는 이유가 없었다. 늑대무리는 서른 네마리 중 일부만 먹었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흩어 놓고 떠났다. 호주에서는 여우 한마리가 왈라비 11마리, 펭귄 74마리를 죽이고 먹지 않고 떠났다.
목적이 있어야 움직인다는 환상은 자연계에 적용하면 이상해진다. 가만히 있어도 될 상황에 파리는 괜히 힘들게 공중 위를 '빙빙'하고 돈다. 고양이는 '쥐'를 잡으면 죽이거나 먹지 않고 한참을 가지고 논다. 이것을 '재미'라고 표현할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것을 '본능'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한 기자가 '일론 머스크'에게 물었다.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일론 머스크는 한참을 고민한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걸까',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스스로 한참 고민해 보던 그는 답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하는 겁니다. 그건 그냥 본능입니다."
그것은 그냥 본능이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아주 이상해진다.
삶의 목적, 공부의 본질, 일하는 이유.
그것을 고민하면 아주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공부하는 이유는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가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삶의 목적은 성공한 직장을 갖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아이를 키우고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고자, 가족을 부양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본능에 '왜'와 '무엇때문에'라는 조건을 붙이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하지 않아도 될 아주 좋은 이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스스로 설정한 이유가 합당하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진실로 그것을 해야 할 때, 이유를 찾아 묻지 않는다.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을 찾아 묻는다.
'왜 하는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을 해아 하는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가."
본능이 내린 결론에 다른 곁가지를 붙일 이유가 없다. 이미 결론은 언어화 할 수 없는 형태로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에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
왜 해야 하는가?
그냥하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명에 이유를 붙이면 끝은 '자살'이다. 생명은 살아야 할 이유가 크게 있지 않다. 사는 이유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주어진 일에 연속성을 해결하는 것일 뿐이다. 단순히 그 연속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의 성패로 '자연'에 선택 당하고 말고의 차이일 뿐이다. 자연선택은 더 나은 돌연변이 인자를 먹이사슬 윗선에 올려 놓고 사회를 그저 그렇게 할 뿐이다. 그뿐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청새치'를 잡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하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겠다고 목표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목적은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며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따위는 없다. 삶은 일종의 놀이다. 스스로 규칙을 정해가며 달성해야 할 '혼자놀기'와 다름 없다. 누군가는 '삶'이라는 놀이판에서 '부자되기'라는 '퀘스트'를 설정하여 달성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기부하기'라는 퀘스트를 설정하여 달성하기도 한다. 남을 돕는다는 생각에 빠지거나, 하늘이 만들어낸 천명을 따른다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본인이 설정한 목적에는 도달해도 좋고 도달하지 않아도 좋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목적 설정하기를 좋아한다. 하찮은 소변 멀리 누기나 물수제비 많이 만들기처럼 달성하면 일회적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끝나는 일이다. 그런류의 경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인생 전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그저 만들어 놓고 달성하는 놀이일 뿐이다. 놀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고로 누군가는 '살빼기', '명문대 가기', '좋은 직장 들어가기' 등의 놀이에 성취를 할수도 있다. 그런 일에 성공했다가 으스댈 일도 아니다. 인간은 패배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창조된 이유는 '그냥'이다. 그냥 그러다보니 '창조'된 것이다. 고로 '패배'는 게임의 쾌락을 난이도를 결정짓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며 그것은 달성할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배트맨 다크나이트에는 아주 매력적인 악역 '조커'가 나온다. 그가 굉장히 악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악'에는 '돈'도, '명예'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본능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뭐든 이유가 없는 것이 가장 무섭다. 그의 대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Why so serious?"
뭐가 그렇게 진지해? 그렇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저 매순간에 본능에 집중하는 바보 같은 삶이 더 큰 행복과 성공을 불러온다.
삶에 커다란 이유를 붙일 필요없다. 삶은 태어나버림과 죽어버림 사이의 공백을 채워 넣는 일일 뿐이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