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TV프로그램에서 관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마와 눈을 경계로하는 눈썹뼈가 도드라지고 광대가 나와 있는 걸로 봐서, 나는 '역마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 곳에서 나서 자랐던 탓에 그 말이 전혀 현실성 없는 꿈 같은 말이었다. 중학교 시절 거울을 본 후를 기점으로 하니, 그 '역마살'이라는 것이 맞는 듯 보인다.
제주, 서울, 뉴질랜드, 인천을 비롯해서 이곳 저곳을 국내외로 싸돌아 다녔다. 갓 스물이 넘은 나이였나?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가 불현듯, 중학교 시절 관상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이 절대적인 이유가 되진 않았지만, 이후로 줄곧 '해외 무역'을 하고 싶었다. 20대 중반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소호무역'에 관심이 있어, 자동차 부품을 아이템으로 하는 '보따리상'을 준비한 적이 있다. 어쩐지 해외에서 외국인들에게 물건을 구매해다가, 국내에 파는 일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의 두 날개에서, 그것도 '무역'이라는 커다란 도매의 가운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실제로 싱가포르로 제주 감귤을 수출하기 전에는 일본에 '부르봉'이라는 회사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한국으로 수출하려고 했다. 당시 샘플로 두 박스를 몇 백 만원에 구매했지만, 결국 '수지'가 맞지 않아 진행하지는 않았다. 또한 어설픈 일본어로 '부르봉 사'에 문의한 결과, 그들은 해외사업을 할 생각이 없다는 답변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사업에 포기한 것은 아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아는 동생과 함께, '가드닝 사업'을 준비했었다. 말이 '사업'이지, 말 그대로 대신 돈을 받고 정원을 정리해주는 일이었다. 뉴질랜드는 정원을 정리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는 행정이 있어, 자신의 정원이라도 그저 방치할 수만은 없다. 이 또한 '비자' 문제로 현금 거래만 몇 회 하고는 하지 못했다.
유학시절에는 '학생비자' 때문에 일주일에 일 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주당 20시간인지, 40시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고작 그것을 일해 가지고는 생활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나는 '뉴질랜드 이야기'라는 뉴질랜드 한인 커뮤니티에서 '귀국세일'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내가 200불 정도에 샀던 '라이스쿠커', 즉 밥통을 누군가가 5불에 파는 것이다. 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돌아가야 하는 해외 생활 특성상, 판매하지 못한 물건은 떨이로 팔거나, 때로는 나눔으로 자주 나오곤 했다. 나는 여기 저기서 귀국 세일로 나온 밥통을 싸게 구매했다. 대략 5불 정도에 구매하거나, 때로는 무료로 받아 오기도 했다. 커뮤니티는 한국 커뮤니티로 시작했으나, 점차 다른 아시아 커뮤니티를 통해서도 싸게 구매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매한 밥통을 '검트리'나 '트레이드미'에 50불에 팔았다. 판매하는 사람에게는 더 비싸게 샀고, 구매하는 사람에게는 더 싸게 팔았다. 그러나 그 중간에서 꽤 괜찮은 마진을 남겼다. 이렇게 남긴 마진이 일주일에 수백불이 됐다.
불필요한 사람에게 사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것은 이득을 남겨주지만, 실제로는 상호의 필요를 채워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꽤 괜찮은 선행에 속한다. 물이 필요하고 불이 필요없는 사람에게 불을 꿔다가 물을 갔다주고, 불이 필요하고 물이 필요없는 사람에게 물을 꿔다가 불을 갔다주면 양쪽을 모두 행복하게 해주고, 다시 스스로도 행복해진다. 그것은 정확하게 내가 이해한 '경제'였고 모두가 이익이 되는 '윈윈윈' 법칙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 농장에서 나오는 귤을 가지고 B2B 사업을 진행했던 적도 있다. 다만 '생물'이 갖고 있는 '저마진', '고위험'의 문제 때문에 속하지는 못했다. 싱가포르 수출을 하고 난 뒤에는 '홍콩과 베트남'에서 수출도 준비하고 있었다. 한 홍콩의 바이어가 내가 올린 구글 광고를 보고 연락을 해왔는데, 자신도 나와 비슷한 일을 한다며 함께 마진 5%짜리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농산물 수출입의 경우, 경로가 복잡여 소비자가 가져가는 이익은 크게 적은 편이다. 이것 또한 결국 무산됐다. 베트남으로 수출하는 것 또한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경우에는 한국에서 직접 수출이 어려워 중국을 통해 하는 3자 수출을 제안 받았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곧 바이어에게 그것이 불가능 하겠다고 전달했고 그쪽에서는 '싱고배'를 구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알겠다고 말했다. 곧바로 '나주배수출' 관련 부서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견적과 바이어에 대한 정보도 대략 제공했다. 다만 담당자는 나의 사업자등록증을 받고 얼마 뒤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가만 보면 지금 쓴 글은 내가 겪은 일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나는 꾸준하게 이동하려고 발악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어찌됐건, 오늘 나간 집에 빠뜨린 물건을 하나 챙기고 나왔다. 나오며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씁쓸하고 허전한 느낌. 모질건 아련하건. 이별은 언제나 먹먹하다.
"짧지만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