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친구가 찬 공은 여지 없이 원하는 곳에 떨어졌다. 고등학교 점심시간이었다. 반대항 축구 경기가 있었다. 앞에 떨어진 공을 급하게 걷어내기 급급했던 나와 달랐다. 그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공을 차면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갔다. 그의 공은 워낙 정확했다. 되려 그 공을 받는 이들이 그의 공을 받아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축구 경기는 온통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모두 그의 계획대로 됐고, 그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좋은 상황일 뿐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정확히 내가 원하는 곳에 공을 보내?"
그때, 그가 했던 말이 인생의 철학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원하는 곳에 공을 보내는 것이 아니야. 공을 먼저 차고 그것이 좋은 계획이라고 믿는 거지."
그랬다. 그와 나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언제나 실패하지 않았다. 실패가 있더라도 그것은 '계획'의 일부였다. 혹여 자신의 계획과 너무 틀어진다고 해도 그는 이렇게 믿었다. "더 잘되려나 보지." 그에게는 그 또한 신의 계획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언제나 그의 계획이었던 축구공 처럼 모든 것은 그의 계획이거나 신의 계획이었다. 신과 그가 모두 그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으니, 그에게는 나쁜 일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아주 커다란 습관 하나를 바꾸었다. 망설임이다. 결국 모든 선택이란 결과와 이어져 있다. 즉, 좋은 선택이란 좋은 결과를 만드는 일이다. 다시말하자면 좋은 결과가 만들어진다면 모든 선택은 좋은 선택이 된다. 짜장면과 짬뽕 중 무엇을 먹어야 할까. 그런 고민이 든다면 아무거나 먹는다. 그리고 '아주 잘먹었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면 된다.결과를 만족하면 그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 된다. 모든 것은 그렇다. 무언가를 먹었을 때는 '잘 먹었다' 라고 말하고, 무언가를 받을 때는 '잘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 비록 아무것도 없어 냉수 한 잔을 마셨다하더라도 크게 만족하고, 비록 허름한 무언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감사히 잘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말을 내뱉고 보면 그 다음에는 그 말에 대한 근거를 찾기 위해 필사의 창의력을 발산하게 된다. 아마 그것이 '감사의 힘'일지도 모른다. 선택은 아무거나 해도 좋다.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만 훈련한다면 말이다. 친구의 공이 오른쪽으로 가던 왼쪽으로 가던 완벽했던 이유다. 봄이 되면, 봄이 되서 좋고, 여름이 되면 여름이 되서 좋으며, 가을이 되면 가을이 되서 좋고, 겨울이 되면 겨울이 되서 좋다.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고 다녀야 한다. 기분이 우울한 날에는 괜히 주변인들에게 '오늘 날씨가 굉장히 좋다.'라는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거짓이라도 좋다. 인간의 뇌는 우매하여 거짓과 진실을 구별치 못한다. 그것을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가 있다. 바로 '백곰효과'다. 사람들에게 북극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하니, 오히려 북극곰을 더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거짓이나 진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인지'하는 것에 반응한다. 고로 진실을 인지할 것이 아니라 인지해야 좋을 것을 인지해야 한다.
살다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가며 일어난다. 이 말은 삶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보다 '임의적으로 걷어 차이는 공'과 같다. 결과적으로 오른쪽과 왼쪽 어느 방향으로 그것이 튀어 나갈지 모른다. 그렇다고 한쪽 방향으로만 나갈리는 없다. 이렇게 대중없는 방향성을 가진 운명이라는 것에 나의 '주체성'을 맡길 수는 없다. 바람이 앞으로 불던, 뒤로 불던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앞쪽이라면 속도가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설령 약간은 오른쪽 왼쪽으로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삶의 방향이란 애초에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없다. 그저 스스로 만들어 가거나 주변에서 만들어주거나 할 뿐이다. 다만 그것을 주변이 만들어 준 것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보다는 하위의 개념이다. 고로 삶의 방향은 첫째로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놀이와 같다. 비어 있는 복숭아 바구니에 축구공을 집어 넣는 일은 단순히 체육강사가 개발한 놀이였으나, 이제와서는 '농구'라는 스포츠가 되었다. 의미는 만들면 생기고 만들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고로 좋은 의미를 만드어 내면 그만이다. 그것 또한 놀이의 일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