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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왜 내가 놓인 상황만 최악이라 생각할까

by 오인환


시간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급한 약속이 생겨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또...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로소 해낸 이들은 더 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해냈을지 모른다. 모든 상황이 완벽해야 한다는 착각은 도착지까지 모든 신호가 파란불이 되면 출발하겠다는 다짐과 같다.



일부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일들은 사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변명'으로 사용될지, '그럼에도 해냈다'는 자부감의 원천으로 사용될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희소성. 그것은 가치를 만든다. 제한된 자원과 무한한 욕구가 만났을 때, 가치가 생긴다. '가치'나 '가격'은 '자원'에 대한 '장벽'이다. 즉, 모두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만 '자원'을 얻어간다.


다시말하면 이렇다. 돌에 비해 '금'은 가치있다. 이유는 이렇다. 자원은 한정되고 그것을 탐하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금을 탐하는 모든 이에게 금을 나눠 줄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높은 가격'이라는 '장벽'이 생긴다. 즉, 장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은 가치가 생긴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관점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는 이렇다. 고통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는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라는 말이 있다. 고통(苦痛)의 고(苦)는 '쓰다'는 의미다. 일부 식재료는 '쓴맛'이 난다. 여기에는 '항산화제, 비타민, 미네랄' 등의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다. 식물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양분을 생산하는데, 가시나 독성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동물에 대한 피해를 줄인다. 이는 생존과 번식 기회를 높인다. 결국, '쓴맛'은 '장벽'이 된다.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영양가는 얻지 못한다. 일부 식물이 자신의 양분을 '쓴맛' 뒤에 감추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물은 그 효과를 얻지 못한다. 생명진화론적으로 '쓴맛'은 그렇게 생겨났다. '사회진화론적'으로 '고통' 또한 그렇다. 아무나 '성장'을 탐할 수 없게 '독'과 같은 방어막을 둔다. 누군가는 접근조차 하지 못해야 진귀한 것은 진귀해진다. '고통'은 성장을 위한 '자양분'을 품는다. 그 껍질일 뿐이다. 애초에 '계란'은 단단한 껍질을 깨야, 요리를 할 수 있고, 파인애플이나 수박도 단단한 과피를 벗겨내야 달콤한 과육을 즐길 수 있다. 단단한 껍질은 그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담고 있는 '장벽'일 뿐이다.



높은 '장벽'은 넘지 못하면 '걸림돌'이지만, 넘어서는 순간 '디딤돌'이 된다. 다시 그것은 나에게로 도전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에 나의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모든 일은 그렇다. 공부도 그렇다. 사업도 그렇다. 운동도 그렇다. 내가 넘어서기 힘들다는 것은 단순히 나에게만 고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에 도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같은 고통을 준다는 의미다. 고로 그 고통은 내가 손쓰지 않아도 나의 경쟁자를 줄여주고,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의 가치를 더 높게 만든다. 세상에는 시작 전에는 방해물이었다가, 완성 후에는 보호막이 되는 것들이 많다. 군대에서 행군을 하던 도중 '군장'이 그렇다. 행군을 처음 시작할 때,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군장은 엄청난 고통이다. 다만 그 안에는 '수통', '반합' , '야전삽', '판초우의' 등 다양한 물품이 들어간다. 그것을 이고 지는 과정에서 고통을 수반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 그것은 엄청난 장비가 된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어있는 페트병이나 비닐을 채워 넣는다면 도착한 뒤에는 아무 장비 없이 상황을 맞이 해야할 지 모른다. 누구나 고통은 가지고 있다. 다만 고통은 결코 절대적이지 못하다. 자신의 고통만이 극한이라고 여긴다. 고로 사람마다 포기하는 시점이 다르다. 구구단이 미적분보다 어렵다는 것은 착시 현상일 뿐이며, 그것을 접하는 이들은 각각 같은 이유로 좌절한다. 고로 '포기'하는 것에 익숙한 이들은 어떤 난이도에서도 포기하며, 지금 마주하는 극한의 난이도도 사실 구구단 수준일 지는 그것을 넘어선 뒤에 판단해야 한다.



이런 속담이 있다. '남의 염병이 니의 고뿔만 못하다.'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을 크게 느껴진다는 의미다.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는 1 더하기 1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수 억의 빚에도 편안해 한다. 둘의 고통 양은 절대 평가 할 수 없다. 사람이 마주하는 고통은 매순간 정해질 뿐이다. 과거나 남에 비할 수 없다.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진다. 우리가 하던 고민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고민과 마흔의 고민이 전혀 다르지 않다. 그때의 고통과 지금의 고통은 다르지 않다. 손톱에 들어간 가시와 팔이 부러진 고통의 크기도 각의 크기로 존재할 뿐이다. 개인의 경험과 감정은 매우 주관적이다. 고로 누군가를 함부로 위로해서는 안되고 함부로 고통을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넘어서기 전에는 그것이 '어렵다'라고 판단해서는 안되고, 내가 넘어섰다고 해서 그것이 '쉽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누군가의 고통에 객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의 고통에도 모두 객관적이지 않다. 고로 가장 중요한 자세는 나이, 시간, 객관적 숫자와 난이도와 상관없이, 모든 고통은 1부터 10까지만 존재하며, 10의 난이도도 넘어서면 1이 된다고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운전시험을 처음 준비할 때, 사람들은 매우 어렵다고 느끼면서 어느 순간이 되면 초보운전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인지편향의 오류를 범한다.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과거의 자신보다는 지금의 자신의 고통을 더 크게보고 객관성과 상관없이 남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여긴다. 이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이 갖는 고통의 의미다. 고로 내가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만 바꾼다면, 대부분은 같은 문제에 대해 나의 경쟁자가 되지 않는다. 고통을 즐기는 것은 거짓이지만, 고통이 지나가면 그것이 즐거웠다고 합리화 할 수 있는 달콤한 과육을 맛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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