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악은 자신만의 선으로 살아간다. 나의 '선'을 '선'이라 할 수 있는가.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회개하고 게으르다는 이유로도 누구는 회개한다. 누구는 사랑하는 이유로 회개하고 누구는 사랑받는 이유로 회개한다. '과오'를 온전한 모습으로 회개하는 것은 가능한가. 각자의 덩어리가 묵직하게 서로의 어깨로 내려 앉는 고통에서 덩어리의 크기는 누가 결정하나.
현미적 인식과 시선으로 서로는 서로의 '괴로움'을 평할 자격이 있는가. 먼저 도달한 이가 나중에 도달한 이를 나약하다 할 수 있는가. 먼저 겪은이가 나중에 겪은이를 안다 할 수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 사죄를 구해야하고, 누구 누구를 용서해야 하나.
죄지은 대상이 사라져 버렸을 때, 누구라도 붙잡고 사죄하고 싶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절대자'를 찾아 나선다. 절대자가 '종교'라는 허울에 갇힌 허수아비 같은 존재라면, 그 또한 나약한 존재이기에 '종교'에 기댈 수는 없다. 그래도 누군가를 막 용서하고 싶고, 누군가를 막 증오하고 싶다면, 애먼 누군가 아니라, 이름 없는 '절대자'가 그나마 낮다. 이유없이 미워하고 싶을 때, 이유없이 용서 받고 싶을 때, 허공에 쏘아 붙이는 혼잣말이 아니라, 모든 걸 듣고 있는 누군가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막, 무언가를 믿고 싶진 않다. 믿어 보려 애를 써봐도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냥 그럴 때가 있다.
보지 말아야 할 누군가의 글을 봤다. 생각이 많아진다. 손끝이 찌릿찌릿 시린게 감기가 골수까지 닿은 모양이다. 몸이 약하지면 마음도 약해진다고 그냥 몸이 그러니, 마음이 그렇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글'에는 오롯하게 폐부를 찌르는 혼자만의 독백이 가득있다. 독백은 주인도 잊어버린 흔적이겠지만 시간은 그것을 나에게 가져왔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 부모형제, 자식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죄가 빼곡하다. 내가 용서해 주겠노라, 말하고 싶지만 글의 주인은 없다. 아마 독백은 독백이 아닌듯 하다. 커보이지 않는 '죄목'에 스스로를 짓이긴 흔적을 보니, 씁쓸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자신만의 형벌을 내리며 고통 받는 동안, 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인식하지 못할 죄를 수없이 지어 사는 '죄인'이, 감히 누가 누구를 사하여 줄것이며, 사하여 준대도 믿음은 불신이 아닌 믿음으로 남아 있겠는가. 믿지 않고, 신임도 없으니, 결국 자신만의 선이 낫다며 고립한다. 세상만사 천하사해(世上萬事 天下四海) 자신만의 선을 행하고 살아간다. 결국은 '선'과 '악'이 극명한 거품으로 파편화되니 괜스레 그 시간이 야속하고 어느 순간의 모두가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