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과 신규 취업자 1021명을 조사한 결과, 수능 350점 이상을 받은 학생의 가구는 종이신문 구독률이 52%였다. 무려 52%면 과반수 정도다. 수능 250점에서 249점 사이는 21%였고, 249점 이하의 경우에는 12%에 불과하다. 수능 점수는 고득점 비중은 인구 분포상 소수다. 그러나 고득점 가정의 무려 절반이 종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놀랍다. 고교 내신등급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그 비중은 크게 다르지 않다. 1~2등급 학생 가정의 종이신문 구독률은 41%에 달한다. 3~4등급의 구독률은 29%이며, 5등급 이하의 구독률은 20%에 불과하다. 왜 종이 신문을 읽는 가정의 아이가 더 높은 학업성취도를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문화'다. 신문은 대체로 '새벽'에 배송된다. 신문은 정보를 취합하여 다음날 아침에 발빠르게 전달한다. 고로 구독자는 아침 일찍, 종이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거나, 아침 식사 중 신문을 펼쳐 놓을 지도 모른다. 아이는 학교를 등교하기 전, '글' 읽는 부모를 만나게 된다. 당연히 이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이들은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대화 주제는 그날 부모가 읽던 신문 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이는 이 대화에 참여하던, 하지 않던 일상의 시작을 다르게 갖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조간신문을 다 읽으시면, 잽싸게 신문을 넘겨 받았던 적이 있다. 조간신문을 넘겨 받은 이유는 그곳에 쓰여 있는 'TV편성표'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에는 '공중파 TV편성표'가 신문의 한 면을 찾이하게 하곤 했는데, 아버지가 신문을 살피는 모습을 흉내내며 '편성표'를 집중해서 봤던 기억이 있다. 아이는 '모방'한다. 그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부모가 한국어를 쓰기에 아이는 한국어를 쓴다. 부모가 한국어를 쓰지만 베트남어를 사용하는 아이는 없다. 아이의 학습 방법은 가정과 사회에서의 모방이다. 고로 아이의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싼 과외를 붙여 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간신문을 읽고 아침 식사마다 해당 주제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체로 아이가 자랄수록 가족 사이에 대화 주제가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대부분은 식사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부모가 허둥지둥,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면, 아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등교한다. 아침식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 점심식사는 학교에서 '친구'와 함께 한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혼자 스마트폰을 보며 밥을 먹기 일 수 일 것이다.
대부분의 약사는 환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후 30분 내로 드세요' 실제로 공복에 먹는 것은 '속쓰림'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한 약사에 따르면 식후 30분을 먹으라는 이유는 하루 3번, 약효가 적절히 분배되어 퍼지길 바라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4시간 간격으로 약을 드세요'. 혹은 하루 세번을 골고루 나눠 드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식후 30분 드세요.'라는 말을 더 쉽게 인지한다. 이는 보통 3~4시간 지속되는 약효를 간격을 두고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8개 중 7개는 유대 자본이다. 유니버설, 파라마운드, MGM, 폭스, 위너브라더스, 컬럼비아. 이 일곱 개의 영화사는 모두 유대인에 의해 창립됐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30%는 유대인이고 노벨 경제학상의 65%가 유대인이다. 미국 연준 의장15명중 10명 이상이 유대인기며, JP모건, 골드만삭스와 같은 대형 금융사의 주인도 유대인이다. 페이스북이나 구글의 창업자도 유대인이며, 대부분의 언론, 방송 영화, 에너지 산업도 모두 유대인의 소유다.
유대인에게 특별한 점이라면 학력이 우수하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들은 높은 학력을 갖는 것일까. 이들의 대부분은 매우 어린 시절부터 성경과 탈무드를 공부한다. '성경'과 '탈무드'이란 읽기 어려운 고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 서사는 굉장히 복잡하다. 또한 이 글은 목적이 분명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하다. 이들은 아침과 저녁마다 성경과 탈무드를 읽는다. 또한 이들은 아침, 점심, 저녁마다 기도를 한다. 그들이 이처럼 시간을 쪼갠 기준은 '식사시간'이다. 그들은 식사 전후에 기도나 성경, 탈무드 읽기를 한다. 부모와 자식이 같은 글을 읽은 후 식사를 하기에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식사 시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는 현대 의사들이 식사시간에 맞춰 약을 먹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들의 목적이 '신앙적'이라 하더라도 어쟀건 그들은 식시시간 전, 후에 '글'을 읽고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그 글은 심지어 쉽게 읽히지도 않는다. 그들은 쉽사리 읽히지 않는 불친절한 고어를 반복해 읽으며 '문해력'을 기른다. 성경과 탈무드가 너무 종교적이라면 그것을 대체 할 수 있는 현대적 문화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신문 읽기'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태블릿으로도 언제든 읽을 수 있는 뉴스를 왜 종이로 읽어야 하나. 이유는 이렇다. 종이 신문을 읽는 것으로 가족은 같은 뉴스를 보게 된다. 즉 아버지가 펴 있는 페이지를 아들이 함께 볼 수가 있다. 또한 종이 신문은 관심사별 혹은 연령별, 조회수별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아이는 게임과 연예계를 좋아하고 아버지는 정치신문을 보는데 마주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다. 또한 댓글이 사라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인들이 글을 읽는 방법은 대체로 F자 읽기로 알려진 읽기 방법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제목을 보고 기사의 첫번째 줄을 읽는다. 그러곤 스크롤을 한참 내려 중간 정도를 살피고 마지막으로 댓글을 본다. 이런 읽기 방식은 '사고력'을 요하는 현대 교육에 맞지 않다. 또한 '비판적 읽기'나 '스스로 생각하기' 등 기회가 사라진다. 요즘 같은 시대에 종이 신문을 읽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가정들이 시대를 주도한다.
나는 원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최대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뉴스는 중독성이 있다. 검증되지 않은 기사를 실시간으로 쏟아낸다. 또한 진실된 정보보다는 거짓 정도가 많다. 다만 오랜 기간 뉴스를 살피지 않으니 시대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람들과 만남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역시나 '시사상식'이 필요한 듯 보인다.
그 많은 신문중에 '한국경제신문'을 고른 이유도 있다. 대체로 '사회면','정치면'보다는 '경제면'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사회면', '정치면'은 흥미롭고 재밌다. 자극적이고 이슈성이 강하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옳지는 않다. 우리는 굳이 필요없는 불필요한 부정적인 정보를 아침부터 주입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뇌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때로는 '부정'과 '긍정'을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그 내용의 '주어'도 구분하지 못한다. 다시말해서, '백곰을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백곰을 떠올린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인 일이나 우울해지는 이야기, 누군가의 불행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 우리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다. 그리고 뇌는 그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무의식에 저장한다. 이것은 굳이 옳지 못하다. 종이신문을 읽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기호'적인 부분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읽고 옆으로 치워버린 글을 가족 구성원이 호기심에서라도 읽는다는 점이다. 가족이 같은 글을 읽는 것은 '알고리즘'에 의해 '버블화'되고 '파편화'된 현대 가정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