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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내가 그린 그림이 사라졌을 때_1화

by 오인환


그날 내가 그린 그림이 사라졌을 때, 그것이 사라졌다고 믿지 않았다. 사라져버린 그림을 찾기 위해 복잡하게 널부러진 캔버스를 뒤적거렸다. 여기도, 저기도 그림은 없었다. 그림을 찾는 일에 지쳐, 새로운 캔버스를 꺼내 들었을 때 그때 알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 잊고 있었다.


고통이 인간을 삼키면 인간은 고통에 의해 소화되어 버린다. 고통이 나를 완전히 소화하면 인간은 비로소 완전한 고통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고통이되면 거기에 '나'는 사라진다. 고통과 '내'가 완전히 같은 존재가 되면, 나는 다른 인간을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린다.


나의 그림이 사라진 날,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잊었다. 고통에 집어 삼켜진 내가 고통이 되어 나를 상실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무엇을 그렸던 것일까.


사라진 그림과 기억은 온데간데 없고, 상실했다는 상실감만이 남았다.


내가 그녀를 만난 건, 작은 서점에서다. 그녀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기억에 난다. 그녀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 지난 4년 간, 그녀의 기억은 더욱 선명해지기만 했다.


그래, 그럴 거라면 그저 더 떠올려보자.


내가 그녀를 그린 이유는 어차피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림을 그렸고 그녀도, 그녀의 그림도, 그녀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렸다.


예전보다 일찍 핀 벗꽃에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벗꽃은 위로 아름답고 아래로 나약했다. 그것이 펄럭거리며 땅으로 떨어질 때, 그것의 역할이 다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날도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같은 옷이네?"


"뭐가?"


"그 옷 말이야. 그 날도 그 옷을 입고 있었거든"


"별걸 다 기억한다."


내가 별걸 다 기억한다는 사실은 흥미롭게도 사실이다. 그녀에 관한 건 뭐든 다 기억에 난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 캔버스에 내가 기억하는 그것을 그려 넣었을 때, 그것은 반듯하게 거기에 남아 있다가, 자고 나면 항상 사라져 있다. 그것이 사라지면 그것을 한참을 찾는다. 무엇을 찾는지 조차 잊고 있을 때, 그것은 발견된다. 그것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기대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에 나타나곤 했다. 그러면 잊혀진 기억은 다시 살아났다.



그날은 '벗꽃'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을 잊었다. 그림은 사라졌다. 나는 그 그림을 한 카페에서 발견하게 됐다.


"저기요, 사장님. 혹시 저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요. 어디서 사셨나요? 알 수 있을 까요?"


카페 사장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나를 살폈다.


"이 그림이요? 글쎄요. 제가 카페를 인수 받았을 때부터 있던 거라, 어디서 났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카페 사장은 그림의 출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럴 것이다. 그 그림은 내가 잃어버린, 내가 잊어버린 그림이다.


"저기 벗꽃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연인 보이시죠? 저, 그림이 꽤 낭만적이어 보여요. 그림 속에 있는 여자가 입은 하얀색 블라우스가 꼭 벗꽃처럼 하늘거리 잖아요."


그녀의 흔적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다가 발견되면 나는 난감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이 왜 그곳에 갔는지, 왜 그전에는 사라졌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잊혀진 기억은 불편한 손님처럼 불쑥 찾아오곤 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가 서점에서 보고 있던 책은 70이 넘은 어느 노시인의 시였다. 어디서 난 용기인지 알 수 없으나,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김영수 시인 책이네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시인이 서른쯤 됐을 때, 부인이 죽었데요."


"아..."


그녀는 읽고 있는 책을 제자리에 다시 꽂았다.


"서른 다섯 쯤이실 꺼에요."


그녀가 시인에 대해 말하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특별히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였다.


"안 사세요? 다시 집어 넣으시길래. 혹시 제가 방해가 됐나요?"


불쑥 입밖으로 나가버린 질문이 실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가 조용히 집어 넣은 시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세요."


"네?"


"김영수 시인이 저희 아버지세요."


그녀가 제자리에 꽂아 놓은 책을 아련히 바라보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영수 시인 좋아하세요?"


"그럼요."


그녀에 대한 기억은 작은 카페에서 다시 떠올랐지만, 그 뒤로의 기억은 마치 구멍난 독에 채워진 무언가처럼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내가 이번에 그렸던 그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마 그것은 어느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 나를 괴롭히겠지만 그것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나는 조금 편온한 표정을 짓고 살아갈 것이다.



오후 3시, 민준을 찾았다. 민준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녀석이다. 녀석은 남다른 비밀을 갖고 있다. 그의 비밀은 따지고 보자면 별것 아니다. 그럴 법한 일이 그럴 법하게 일어났을 뿐이다. 그는 독한 약 때문에 빠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언제나 모자를 쓰고 다녔다.


"몸은 좀 어때?"


민준은 답했다.


"뭘 어때, 당연히 아프지, 원래 암에 걸리면 고통스러운 거야."


민준의 대답은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웃으며 답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하듯, 감정 없이 말하는 그를 보고 의연함이란 의지보다 천성에 가깝다고 느꼈다.


"다른 걸 떠나서, 병원 밥이 맛대가리가 없어. 매일 그런 걸 먹다보면 너도 암에 걸릴거야."


민준의 싱거운 농담에 피식 웃었다.


"내가 의사로 있을 때는 그냥 그랬는데, 환자가 되니까 알겠더라고. 역시 아프길 잘했어. 환자의 마음을 잘 아는 의사가 됐으니까."


민준은 웃으며 병실 밖 창을 바라봤다. 그가 앉아 있는 병실은 꽤 밝은 편이었다. 볕이 잘 들어오고 창이 시원하게 나있어 병원에서 밖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민준은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요즘도 지현이 생각해?"


민준이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의사에게 시안부 선고를 받은 의사가 보내는 동정의 눈빛은 묘한 감정을 불러냈다.


"지현이? 네가 지금 말하니까, 생각이 나네. 잔인한 놈."


웃으며 말했지만 거짓이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내가 그림을 그려 넣을수록 사라졌고 떠올리려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죽은 그림이 기억과 함께 다시 나타나면 그것은 다시 그녀를 다시 살려냈다.


"얼마나 됐지? 이제 2년 넘었나?"


"2년이 뭐야. 벌써 4년이나 됐어. 너도 참 무심하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야, 걔가 너를 만난 게..."


"내가 어디가 어때서?"


"지현이, 걔가 우리과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아냐, 걔가 너랑 만나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우리과에서는 난리도 아니였어."


떠올려 보건데, 그녀에 대한 기억은 듬성듬성이지만, 얼굴은 기억 나질 않는다. 그녀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그려보려 할수록, 더 희미해졌다.


"야, 나도 꽤 괜찮았거든. 실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머니는 잘 계시냐?"


"잘 계시지, 어제도 오셨어. 한참을 곡을 하다 가신다. 그러게 너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쓸데없는 소리라니, 어머니도 당연히 아셔야지."


민준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민준도 숨을 깊게 쉬었다.


"준현아. 너 저기 벽에 걸린 그림 보이냐?"


"어디?"


"저기, TV 옆에 걸린 그림 말이야."


그림은 꽤 노골적으로 존재를 들어내고 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했다. 그게 왜 지금 보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저거 선물 준 날 말이야."


"응."


"그날, 진짜 비가 억수로 왔는데 말이야. 저 그림을 보면 그날 비가 억수로 왔다는게 너무 그려지지 않냐?"


그림을 보았다. 그림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곰인형을 들고 있었다.


"저 그림에 곰인형을 보면 꼭 너랑 지현이가 떠오르더라."


그림을 보자,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느라 비를 맞고 있었다. 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들고 있던 곰인형이 묵직해졌다는 감각만은 분명 살아났다.



"이 병원이었지,"


나는 잊혀진 기억을 상기해냈다. 곰인형의 묵직함이 가슴으로 내려와 짓누르고 있었다.


"네가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아서 나 죽으면 그때 줄려고 했는데, 이거 받아라."


민준은 병실 침대 밑에서 종이 상자를 꺼냈다. 종이 상자를 열고 그것을 나에게 보였다. 거기에는 그림에 있던 곰인형이 누워 있었다.


"이게 왜 여기있어?"


"그날이 지현이 생일이었잖아. 야 임마, 아무리 그래도 곰인형이 뭐냐? 돈이 필요하면 빌려 달라고 하던가,"


민준은 웃었다. 기억이 되살아 났다. 나는 곰인형을 들고 서 있었다. 오른손을 묵직하게 만들었던 곰인형의 촉감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기억에 나질 않는다. 아마 저도 모르게 인형을 떨어뜨렸겠지,


"잊혀진 기억이라 들추긴 쫌 그렇긴 한데, 그래도 뭔가 내가 가지고 있는게 쫌 그래. 나 죽기 전에 그래도 네가 가져가라."


병원 앞에서 비를 맞고 한참 멍하게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곰인형도 선명히 떠올랐다. 주머니에 있던 전 재산을 다해도 꽤 고급진 레스토랑을 가기에 벅찼다. 나는 무심히 '그날'을 잊은 척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침과 점심, 저녁 식사까지 마칠 시간까지,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루가 다 지나기 전, 곰인형과 목도리를 구매했다.


'미안해, 일이 좀 있었어, 집 앞에 있는 카페로 나와. 그때보자.'


무심한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흘렀고, 두 시간이 흘렀다. 카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에게 줄 곰인형과 목도리를 오른손에 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일을 잊는 무심한 남자친구라는 오명이 '돈 없는 무능한 남자친구'라는 이름보다 그럴싸 했다. 아마 그녀가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녀가 연락이 안되는 이유는 충분했다. 약속시간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준현아. 나다. 민준이."


자리에 일어나 목도리와 선물 꾸러미를 쥔 채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너 어디냐?"


"그건 왜?"


퉁명한 대답이 바로 간 것은 슬픔과 짜증, 미움, 미안함이라는 다양 복잡한 감정이 나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를 왼쪽 어깨에 거치하고 전화를 받았다.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곱게 포장된 목도리를 뜯어 꺼냈다.


"왜? 말해, 나 지금 바빠." 포장지를 아무렇게나 쥐고 목도리를 목에 걸었다.


"여기, 새생명병원이야."


민준의 목소리가 진중한 것이 어쩐지 평소 같지 않았다.


"거긴 왜?"


무언가 심각한 분위기가 나를 덥쳤다. 그것은 두려움, 공포가 되어 나를 삼켰다.


'촤아악'


수화기 넘어서 억수같은 소나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창가를 보니 이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촤아악'


"준현아... 그... 준현아."


민준의 목소리가 사실 모든 것을 이미 말하고 있었다.


"준현아... 새생명병원이야.. 네가 와야 될 것 같아."



곰인형이 돌아왔다. 기억이 함께 돌아왔다. 그것만은 잊고 싶었다. 그래서 그렸을 테다. 곰인형을 들고 있는 남자의 사진이 왜 거기에 걸려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선물을 줬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다만 기억나질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내가 잊었을 뿐이다.


"다시 기억나게 해서 미안하다. 그날, 말하지 못했던 게 있거든."


"그게 뭔데."


나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민준이 느끼도록 말이다. 민준은 나약한 몸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지현이가 응급실로 이송될 때, 나한테 한 말이 있거든. 원래는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죽을 때가 다되니까, 그래도 나랑 같이 사라져야 할 기억은 아닌것 같아서."


민준은 지현이 실려 온 날, 응급실 당직 의사였다. 그게 참 기가막힌 인연이라는 것이다. 피칠갑 한 지현을 본 민준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민준 씨, 괜찮을까요?"


지현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민준은 그럴 것이라고 했다. 거기까지가 민준이 알려준 그날의 마지막 대화였다.


"지현이 실려 왔을 때, 꼭 비밀로 해달라고 한게 있거든."


"비밀?, 무슨 비밀인데?"


"지금도 이걸 말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민준은 뜸을 드렸다.


"아이가 있었어. 지현이한테."


지현이 세상을 떠나던 날, 나는 곁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민준이 함께 해줘서 그것이 나를 위로했다. 민준은 4년이 훨씬 지난 비밀을 말하고 있었다.


"에휴, 괜히 말했나보다, 그냥 나를 좀 죽여주라."


민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웃었다.


"근데,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 내가 해봐야 얼마나 살겠니?"


민준은 의사 일때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떠들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환자가 되더니 죽음을 초월한 듯 말하곤 했다.


"지현이가 비밀로 해달래?"


"네가 우리 어머니한테 비밀을 말한거, 이거랑 퉁치는 거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날 지현을 그때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아이는 다섯 살은 되어 있을 것이다. 몰라도 지현과 나는 조그마한 원룸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고, 온갖 육아와 결혼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를 다투는 부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모두 '허구'가 된 지금.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아마 너무 비현실적인 감정이라 그랬으리라.



민준이가 '병원'에서 근무할 때, 지현이와 종종 찾아가곤 했다. 지현이는 갑상선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그 핑계삼아 데이트를 병원에서 하기도 했다. 내 주머니 사정을 아는 민준은 종종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권했고 물론 식사는 민준이 사곤 했다.


"자존심 이런거 하지말고 받아. 네가 샀다고 그래."


민준은 카드를 건냈다.


"뭐야, 너. 누굴 거지로 아나"


"얌마, 빌려주는 거야. 그리고 병원말고 다른데 가서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래라."


민준의 카드를 건냈다.


"너, 이거 후회할 수도 있어."


나는 웃었다. 민준은 팔로 내 머리를 감싸쥐고 흔들었다.


"새끼가... 빌려주는 거라고."


민준이 건낸 카드는 이후로 꽤 유용하게 사용했다. 물론 내가 등단 후 글밥으로 먹고 살만했을 때, 빌린 돈은 모두 갚았다.


"민준아. 일단 고맙다."


나는 민준이 건낸 인형을 들고 섰다.


"벌써가게? 나 심심해 임마. 좀 더 있다가가."


"내가 너처럼 백수인 줄 아냐. 또 올께 임마."


민준을 보고 피식하고 웃었다.



병원을 나서자, 마른 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인형을 품에 넣었다. 그것이 젖지 않도록 코트 깊은 곳에 넣었다. 내리는 비는 맞을만 했다. 몇 번 비를 맞다보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나는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우산 있나요?"


"저기, 앞에 진열되어 있어요."


우산을 들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다시 찾아온 기억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계산할께요"


"6천원입니다"


"네,"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냈다. 편의점 알바가 잔돈을 거슬러 준다.


"여기, 4천원입니다."


"저기, 혹시 저기 노트에 있는 그림 직접 그리신 건가요?"


"네? 네. 왜 그러시죠?"


"아니요, 어디서 많이 본 그림 같아서요."


"아, 제가 미대를 다니고 있는데 지나가면서 본 그림을 그려봤어요."


분명했다. 그 그림은 나의 그림이다. 이 미대생 아르바이트 생은 나의 그림을 봤을 것이다.


"어디서 보셨는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왜, 무슨 문제있을까요?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우산을 들고 나왔다. 확실하다. 그 그림은 나의 그림이다. 출판사에서는 출간할 책의 '표지 디자인안'을 몇 개 보여주었다.


"혹시, 제가 그림도 그리는데, 표지 디자인을 제가 직접 그려보면 안될까요?"


"작가 님이 직접 그리시게요? 저희는 좋죠. 일단 저희 디자인이랑 해서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분위기가 맞는 그림으로 선정하는 걸로 할께요."


다행히 출판사에서는 이를 환영하는 눈치였다.


일은 저질러 났지만, 딱히 생각해 놓은 그림은 없었다. 책은 남자 주인공의 사랑하는 여인이 고양이가 돼버린 소재의 소설이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고양이한마리를 그렸다. 고양이는 새침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고양이 뒷편으로 벗꽃이 날렸다. 밋밋한 그림에 포인트가 필요했다. 그때 찾은 것이 서점이었다. 다른 소설은 어떤 디자인을 하고 있을까. 서점에 책을 한참을 서성 거렸다. 그때, '김영수 시인'의 시집을 발견했다.


김영수 시인은 나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시와 함께 그림도 직접 그렸다. 김영수 시인의 그림 풍을 닮고 싶었다. 그의 시집을 구매했다.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그는 그의 시에서 자신의 인생을 녹였다. 그 매력에 그의 다른 책을 찾아 보았다.


"혹시, 김영수 시인으로 출간된 책이 있을까요?"


서점 점원에게 물었다. 점원은 컴퓨터를 두드리며 목록을 검색했다.


"음. 네, 수필이랑 시집이 꽤 많이 나오는데, 어떤 책 찾으세요?"


김영수 시인의 글을 찾아 읽은 것은 그 뒤로부터다. 시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매려됐다. 그러나 나를 더욱 사로잡은 건 그의 '삶'이다. 그의 삶은 '시', 그 자체였으며 그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소설이었다.



김영수 시인의 딸을 보다니, 지현을 만난 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운명과 같았다. 김영수 시인의 딸은 그의 수필에서 이미 본 적 있기 때문이다. 김영수 시인은 작업을 하기 위해, 종종 해외를 다니곤 했다. 대체로 중국과 일본을 다녀왔다. 시인은 딸아이를 혼자 키우며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낭만 그 자체였다. 딸과 함께 여행을 가서, 시를 쓰고 글을 지었다. 그가 쓴 책에는 '딸'에 관한 글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잘 안다. 비록 그녀를 처음 보았으나,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보통의 대화라면 마무리 됐을 타이밍이지만, 나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놀라 물었다.


"혹시 김지현 씨인가요?"


"어머"


"제가 아버지 책을 전부 갖고 있어요."


"전부요? 꽤 많을텐데..."


그렇다 김영수 시인은 다작하는 작가다. 그러나 시인의 글이라면 나는 일단 구매하고 봤다. 그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곱씹고 곱씹었다. 아무리 내가 쥐어짠다고 해도 그의 작품에는 언제든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저도 아버지 글 다 못 읽었어요. '다'가 아니라, 거의 읽지 못했어요."


"아버님은 정말이지, 최고의 작가세요."


"아, 그런가요?"


지현은 이어 다른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책을 훑었다.


"저기, 책 구매하시고 혹시 잠시 시간 되실까요?"


그때, 그녀가 '아니요'라고 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행이도 그녀는 '네'라고 답했다.



서점을 나와 카페로 장소를 이동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아버님은 요즘 잘지내신가요? 신간이 나오지 않으시던데..."


"아, 아버지가 이제 글을 못쓰세요."


"왜요?"


"특별한 건 아니구, 얼마 전 부터 '치매'가 있으셨어요."


"아... 그러셨구나"


김영수 시인은 처음에는 할 일을 잊으셨고, 이후에는 하고 있는 일을 잊으셨고, 나중에는 했던 일을 잊으셨다고 했다. 지금은 기억의 많은 부분이 구멍났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이고, 누구였고,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영수 시인의 이야기를 글이 아닌, 말로 듣자 '시'라는 예술이 현실로 다가왔다. 김영수 시인의 기억은 수십년을 공간으로 두고 아내를 잃기 전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저는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엄마의 얼굴을 알고 있어요. 어떤 감성을 가진 분이신지, 어떤 심성을 가진 분인지도 알고 있어요. 그게 저희 아버지가 저에게 남긴 엄마에 대한 기억이에요"


나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지현의 어머니'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어떤 감성을 가진 분인지, 어떤 심성을 가진 분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술'을 전공한 미대생이셨다. 김영수 시인이 글이 아닌, '그림'을 짓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김영수 시인은 글을 썼고 그의 아내는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아내가 심장병으로 사망했을 때, 지현의 나이는 고작 세 살이었다. 지현은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그녀의 아버지 김영수 시인 또한 아내의 이야기 하기를 즐겼다. 그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끝난 것에 지현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아야 할 세계가 사라진 아쉬움이었다. 그녀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의대를 선택한 이유는 어찌보면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의대를 다니던 지현은 어느 순간, 돌연 의대를 자퇴했다. 의사가 느낄 수 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겪고 죽음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패하는 것은 '삶'이다. 의사는 '삶'의 편에 서 있기에 결국 언제나 패자가 됐다. 죽음을 맞이해도 패배하지 않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매순간 어머니와의 추억을 통해, 어머니를 다시 살려내는 어버지가 진짜 '죽음을 이기는 삶의 편'이라 여겼다. 삶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그를 '문학도'로 바꾸었다.



그녀는 이제 어버지가 잊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했다. 아버지 속, 어머니의 영혼은 그녀에게 이식되어 다시 삶을 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도 살아 있었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으리라.


나는 그날 그녀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표정을 밝혔다.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면, 소름끼치지 않으세요?"


"아니요, 전혀요. 오히려 감사하죠. 저도 아버지 책을 더 읽어 봐야겠어요."


"네, 꼭이요."


김영수 시인의 책은 대체로 절판되거나 희귀본이었다. 작가는 대체로 자신의 책을 소장하는 편이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기에, 김영수 시인의 책을 찾는 것은 아마 그의 딸임에도 어려울 것이다.


"책 구하기 힘드실꺼에요. 제가 빌려드릴께요."


나는 말했다. "아, 그러면 감사하죠" 그녀는 답했다. 그녀와 두 번 째 인연이 이어지게 된 이유는 내가 가진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따지면, 운명이라고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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