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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an 31. 2024

[생각] 나에게만 행운이 일어나는 이유?

왜 나는 운이 좋은가

 주차 공간을 발견할 확률은 모두에게 같을까. 아니다. 왜 그런가.

한 번은 굉장히 특별한 대화를 한 적 있다. 주차에 관한 내용이다. 번잡한 시내에서 주차 공간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어디를 가도 반드시 주차 공간을 발견한다. 엄청난 능력이다. 그것도 목적지와 근접하게 말이다. 그것은 자칫 마법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 주차할 곳이 정말 없더라구요."

 "저는 항상 주차할 공간이 있던데요. 항상 바로 앞에 주차해요."

 눈 감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 처럼, 둘은 같은 것을 만지며 다른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서로 그럴리 없다는 눈치였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주차 공간이 정말 항상 있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진실은 이렇다. 주차를 하기 위해 나는 주변을 몇 번이고 돈다. 돌다보면 그 자리에 반드시 공간이 생겼다. 이 이야기를 들은 상대는 그것은 항상 있는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무슨 차이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개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또한 누군가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 듯, 사람 사이에는 분명 취향의 차이가 존재한다. 같은 공간을 들어서며 누군가는 '꽤 쌀쌀하네'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꽤 후덥지근하네'라고 말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차이가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라는 말이다.

 누구는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누구는 운이 좋다고 여기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온도차이가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죽는다. 쉽게 말해,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을 객관성의 지표로 착각하는 순간 삶은 모순 덩어리가 된다. 빨간색이 빨갛다는 것은 내가 빨갛다고 인식을 해서 그렇지, 그것이 빨간색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내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지, 그것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주를 관측하던 허블 망원경은 이제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에게 그 역할을 넘겨 주었다. 우리는 더 깨끗한 우주를 볼 수 있게 됐다. 과연 그럴까.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 찍힌 우주는 분명 선명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제임스웹 망원경이 관찰한 우주는 '근적외선과 적외선'만을 관측한 결과다. 즉, 선명하게 보이는 우주라는 것은 실제 우리가 볼 수 없는 우주인 것이다. 적외선 카메라로 인간을 관찰하면 어떻게 보일까. 사람의 이미지는 '눈, 코, 입'이 분명하고 표정과 피부밝기도 볼 수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적외선 카메라로 본 인간에게 그런 것은 없다. 적외선 카메라로 인간을 본다면 그저 열분포에 의해 알록달록 빛나는 아지랑이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일까. 그것이 본 모양일까. 알 수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대상의 극일부다. 무엇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대상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때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행했다. 우주가 나를 위해 작동한다는 원리는 꽤 멋들어졌다. 이해 할 수 없지만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는 반드시 모순을 갖는다. '잡아야하는 경찰'과 '도망쳐야 하는 도둑'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양쪽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저 일정 확률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는 순간, 현실이 되는 양자역학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원자폭탄에 의해 동시에 사망한 수 만명의 사람은 무엇일까. 이 또한 끌어당김의 법칙일까. 간단히 '5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5불'이 끌어 당겨진다고 한다면 과연 자연계에서 어떤 물리법칙과 사회적 인과관계가 끊임없이 생겨나야 하는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는 모호한 법칙은 도무지 신뢰할 수 없다.

 한때는 그것에 심취하여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분명있다. 백인이 흑인이 되기를 바라거나, 적도 부근 여름에 간절히 바라는 눈폭풍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째서 불가능한가. 어째서 고급 자동차를 타거나, 승진을 하거나, 원하는 돈은 끌어 당길 수 있는데, 어떤 것은 또 안되는가. 이러한 것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을 '바우메이스터 현상(Baader-Meinhof Phenomenon)이라고 하는데 어떤 대상이나 정보를 처음 주목하게 되면 그 뒤로는 어쩐지 그것을 더 자주 보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인지 편향이다. 쌍둥이를 낳고 나니, 세상에 쌍둥이가 많아 보인다던지, 스마트폰을 바꾸었더니 비슷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처럼 보인다. 이런 인지 편향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데, 쉽게 말해서 내가 주차공간을 쉽게 발견하는 이유는 실제 우주가 나를 위해 주차공간이 마련해 주어서가 아니라, 주차공간을 찾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과 주의가 집중되어져 있기에 더 쉽게 인지하고 찾아낸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환경에서 특정 패턴이나 정보를 선택적으로 인지하고 그것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하여 믿는다. 즉, 모두 자기의 관점에서 최대한 코끼리를 다듬고 있는 장님인 셈이다. 우리가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만지고 있는 코끼리를 더 섬세하게 더듬어 볼 것이 아니라, 감고 있는 눈을 떠야 한다. 될 수 있다면 선택적 만족에 의한 긍정적인 시선을 취하고 어떤 측면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면 감은 눈을 떠서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전모를 살피는 것이다.

이런 선택적 긍정은 삶을 무엇으로 채우는지 또한 결정한다. 삶은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인식으로 채워진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시대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시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연금 상태에서 살았는데, 그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널리 받아진 것은 이미 그가 사망한 이후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실제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았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살다가 그렇게 믿고 죽었다면 그들에게 세상은 그저 그럴 뿐이다. 고로 실제하는 '실체'가 무엇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때로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느냐 이다. 될 수 있다면 삶이 부정적인 것 투성이라고 하더라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믿고 죽는 것이 행복한 삶은 아닐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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