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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18. 2024

[생각]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_고로 하고 싶은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렸다.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고 나를 쳐다 보지 않는다. 내 이야기가 주제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럴 것 같다는 착각. 그것은 '나'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어설픈 조작이 인위성을 띄고 스스로가 아닌 불완전한 자신이 됐다. 그 불완전함이 인생으로 채워진다.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나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고로 누군가를 위한 변명 따위는 필요없다. 그것이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다면 그저 그것으로 그만이다.



 과거에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 정당성은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선택에 그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관심없는 이들을 설득하곤 했다.


 그들은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그들 스스로의 문제를 더 골똘히 고민했다. 매우 냉정할 수 있지만 '남'이라는 '바운더리'에는 '부모' 또한 포함된다. 자신만큼 자신을 생각하는 이는 없다. 모두 자신의 시선에서 삶의 지혜를 축적한다. 고로 완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이는 오롯하게 자신이고, 자신에 대한 지혜는 오롯하게 자신만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보일까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바 노심초사 할 필요는 없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넘길지, 왼쪽으로 넘길지.


 그 사소한 결정조차 '외부'로 두었다. 그 시선에 대한 부담을 하나씩 놓아두면. 결국은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 어쩐지 그러나 그런 주체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영락없는 '아저씨'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한 남자 선생님이 점심식사 후 물을 한 잔 마셨다. 입으로 들어간 물을 두어번 오물오물 하셨다. 입속에 숨은 밥알을 찾아 휩쓸고 목구멍으로 함께 넘기셨다. 그 행동이 왜 그렇게 아저씨 같고 비위생적으로 보였는지, 아직도 기억에 선한다.


'나는 어른이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언젠가 식사를 마치고 나 또한 입에 남은 잔여 밥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예전 다짐이 떠올랐지만 남은 밥알을 더 깔끔하게 목구멍으로 넘기는 더 현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갖고 싶었다. 사촌네에 있던 RC카는 아주 멋져 보였다. 그것을 졸랐던 것이 수년이었고, 그 동안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미니카'라는 장난감이 유행했다. 학교 쓰레기통에서 바퀴 하나가 없는 '미니카'를 주었는데 그것을 한참 가지고 놀았다. 부모님은 내가 어디선가 가지고 온 장난감을 분명 보셨다. 그럼에도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시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동네에서 선이 연결된 2000원짜리 비행기가 있었다. 비록 앞으로, 뒤로 밖에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꿈을 이룬 것 처럼 기뻤다. 장난감은 싸구려 장난감으로 당일날 잠시 앞으로, 뒤로 움직이다가 멈춰 버렸다. 아버지는 내가 용돈으로 구매한 장난감을 살펴보더니, 전기선을 잘라 주셨다. 그 뒤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RC카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성인이 된 어느날, 불현듯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게 언제인고 하면, 내 딸이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집어 들면서 말했을 때이다. 아이는 그것을 사달라고 했다. 가격을 살폈다.


 "200만원"


 그것은 '드론'이었다. 헛웃음이 났고 살 수 없다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딸의 입술이 빼쭉 나왔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을 지불할 '효용성'은 정비례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내가 드론을 사주지 않았던 기억은 '효용성'과 '가치'에 기준을 두었지만, 딸에게 같은 기억은 '결핍'으로 남을 수 있다. 그것에 대한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이유는 각기 자신의 입장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겉으로 수많은 무언가를 생략해서 일 것이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인형을 사달라고 했다. 집에 인형이라면 '장사'를 해도 쏠쏠할 만큼 쌓여 있다. 안 된다고 했다. 그때, 나와 아이는 분명 다른 기억을 졌으리라...


 나는 아이의 입장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나의 입장을 100%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러한 오해는 쌓이고 쌓인다. 물론 노력은 하겠지만 각자 자신의 입장에 매몰되어 상대의 입장이 100%되지 못한다. 그것은 나와 아이의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같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인간의 언어는 감정을 표현하기에 너무 한정적이다. 장황하게 설명해도 그것을 모두 듣기에, 우리는 한정적인 시간을 가지고 있고 그것보다 못한 인내심을 갖고 있다. 고로 타인이 나를 살피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고로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고로 하고 싶은대로 하라. 칭찬과 비난, 관심 모두 일시적이며, 스치듯 건들였다가 본질적으로는 모두 각자의 내면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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