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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29. 2024

[일상] 어떤 순간에도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마법_관음사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당장 일주일 전후의 날씨와 기온을 확인할 수 있고,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다니 말이다. 전국이 무언가, 전 세계의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다.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빛의 속도로 소통하고 그 비용이 0에 가깝다니 '지금'이라는 순간은 '과거의 거의 모든 인류'에게 기적에 가깝다.

 '현재'에 너무 젖어 있어 그렇지, 인류가 태어난 뒤의 모든 역사학적 관점에서 내가 누리는 것은 '초능력'에 가깝지 않은가.

 세계 어느 물건이라도 손가락 하나면 집앞으로 오게 할 수 있고, 손가락 몇 번이면 따뜻한 밥상이 집앞으로 찾아온다. 시간을 잠시만 돌려도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현재에 젖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것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것에 둘러쌓여 감사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할머니댁은 푸세식 변기였다. 화장실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푸세식이었다. 그 앞에는 한 장씩 찢어 버리는 '달력'이 하나 걸려 있었다.

 주기마다 똥 푸는 차가 똥을 퍼가면 잠시 변의 높이는 낮아졌다. 어떤 날에는 변이 높게 쌓여 공포감도 주었다. 잠을 자다가도 그곳에 빠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을 밟은 신발이 더러운 푸세식 화장실에 닿았다. 주변은 미끌거렸고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가득했다. 눅눅한 옷을 대충 추수려 변기에 쪼그려 앉으면 그 습함과 꼬릿한 냄새가 온몸과 옷에 달라 붙어 침실까지 따라왔다. 화장실에는 청록색 똥파리가 있었다. 그것을 아무리 손을 휘둘러 내쫒아도 머리카락, 등, 엉덩이에 그것이 앉기도 했다. 그 소름끼침은 지금도 훤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집 변기는 그래도 좌변기라 할머니댁 보다는 낫았다. 항상 걱정했던 것은 '벌레'와의 싸움이다. 제주는 워낙 습한 지역이라 고층에 살지 않으면 지금도 벌레가 적지 않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털썩하고 앉으면 엉덩이나 허벅지에 민달팽이가 깔려 있기 일 수 였다. 잘 밀봉하지 않은 음료나 음식은 바퀴벌레, 개미, 귀뚜라미, 거미가 들어가 있었는데 여차하면 그것을 삼키게 될 수도 있다.

 한번은 양치를 하려고 칫솔을 집었다. 칫솔에 이미 '치약'이 곱게 발려 있었다.

'어? 뭐지?'

하고 가까이 살피니 '민달팽이'였다. 깜짝 놀라 칫솔을 버리고 그 뒤로 나는 꼭 칫솔뚜껑을 닫고 사용했다.

 '사촌형'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밤에 볼일이 급해 화장실을 찾았다. 두 세 보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는 화장실이었다. 불이 없이 어두운 밤, 나는 맨발로 폴짝 폴짝 뛰어갔다. 뒷꿈치를 들어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빠직'하는 발밑 기분 나쁜 감촉이 감돌았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그대로 바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다시 그 자리를 찾았을 때는 반쯤만 남은 바퀴벌레 사체가 있었다. 소름끼쳤다. 발밑을 봤더니 나머지의 사체중 일부가 거기에 붙어 있다. 지금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초등학교를 갔던가, 가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황당무계할 정도다. 천지가 개벽하기 전 일상이다. 그렇다고 그때가 불행했냐 묻는다면 아니다. 나는 그 삶에서 '불행'을 느끼지 못했다. 더럽다거나 살지 못하겠다는 감정도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상이었고 비교대상이 있는 지금에서나 '더러운 추억' 정도일 뿐이다. '나은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가 된 지금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시절 스마트폰 없이 남겨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짧은 순간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 시절에도 분명 화장실에 앉아 있거나 샤워를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시간들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나 뿐만 아니라,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견디지 못할듯 싶다.

 흔히 MZ의 끝자락이라고 하는 세대라고 하지만, 내가 요즘 세대와 섞여 MZ가 되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다. 연탄불 난방을 경험하고 요강을 사용해 봤으며, 푸세식 화장실과 LP판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MZ로 묶여도 괜찮은 걸까. 나를 제외한 다른 세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면서, 때로는 MZ도 그렇게 별나라 세대는 아닌 것 같다.

 한 번은 누군가와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일대일 단독으로 식사 할 때 였다. 상대는 나와 같이 묶여 있는 MZ다. 그때 나는 같은 MZ끼리에서도 세대차이를 느꼈다. 나는 상대 앞에서 조용히 스마트폰 전원을 껐다. 그리고 가방 속으로 집어 넣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그 순간은 지독하게 길었다. 그 이유는 상대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고 나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상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눈과 정신, 시선이 쏠리는 그를 보면 한편으로 마음이 씁쓸했다. 

세상 밖은 '스마트폰 속'보다 덜 중요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주할 사람은 하나고, 스마트폰은 '세계'가 담겨 있지 않은가. 그날 상대를 위해 스마트폰을 껐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후회한다. 배려는 사실, '상대'가 그 가치를 알고 있을 때 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세상사 각자 자신만의 기준이 있겠지만, 그날 나는 상대에게 '매너'지적을 당했다. 식사 후 책 띠지를 테이블에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면 그릇 정리는 물론 물티슈로 주변까지 강박적으로 닦고 나온다. 그러나 결국 매너지적을 당했다. 너저분한 상대의 테이블보다 나의 띠지가 하나가 더 더럽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 시간 내내,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대화 중간 중간을 가만히 기다리게 했던 상대의 지적은 더더욱 그랬다.

 뉴질랜드에서는 10년을 살았다.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 조차 없는 마을에 살았다. 물론 주변에 한국인들이 있었다. 다만 외국어를 사용하는 날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어떤 단어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먼저 떠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반 외국인 상태가 됐을 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습지만 한국 문화는 다시 낯설었다. 얼마나 어색했는고 하면, 한국어 어감과 한국인의 인상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하철에서 어깨를 치고 가도 당연한 일이고, 무표정한 표정이 무섭게 느껴지던 시기다. 인천 어딘가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주머니 둘이서 심하게 싸우는 듯 했다. 뉘양스를 들었다. 뉘양스가 먼저 들리고 내용이 들렸다. 내용은 그저 잡담이었다. 사람들의 잡담은 내용상 험담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험담을 할 때면, 그 표정과 억양이 표독하다. 그 도파민의 향연에 스스로는 '쾌락'에 빠져 있지만, 보기에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다.

 한 번은 택시를 탔고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그러자 기사 님은 수십 년 택시운전을 하면서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손님은 처음봤다며 웃으셨다. 한국에서는 벨트를 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학습했다. 해외에 살 때, 내가 살던 곳은 '백인'이 많이 사는 시골지역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누구나 사람이 보이면 눈을 찾아 맞췄다. 눈이 맞춰지면 웃어보이며 '하이' 그랬다. 서귀포 부모님 댁 근처의 마트를 찾은 적 있다. 어느쪽에선가 40대 아주머니가 계셨다.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웃었다. 상대의 표정은 이상하게 바뀌었다. 아차 싶었다.

 '앗, 여기는 아니지'

나 또한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짓는 것.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

그것이 이곳의 매너였다.

그때에 비하면 나는 웃는 일이 덜하고 표정은 다른 한국인들보다 더 차갑게 바뀌었다.

 언젠가 누구는 배달 음식 먹고 그릇을 뽀득 뽀득하게 씻어 내놓는 나를 보고 말했다. '어차피 가져가면 다시 씻으셔야 돼'. 그는 음식물과 쓰레기를 넣어 보내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되려 씻어가면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상대는 음식물과 쓰레기를 보내야 그쪽에서도 할일이 있는 거라고 했다. 그게.. 일종의 매너라고...

 같은 인물과 비슷한 일화가 있다. 한 번은 물건을 구입하고 돌아서며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옆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물건 공짜로 받았어? 저쪽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 뭐가 감사해. 저쪽이 고마워 해아지'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지적을 받았다. 상대는 언제나 나를 가르쳐줬다. 그치만 옳은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가지 않는 경우도 무수했다.

살아보니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살아보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 '매너 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했다. 악착 같이 나를 그들과 같은 부류로 만들기 위해, 발악하는 것 같다.

'혼자 있으니, 외롭다. 같이 있자'

그들은 어둠의 구렁텅이에 혼자 있는 사람들이며, 언제나 외로워 했다. 고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들어 동족을 늘리고 싶어 했다.

'어때, 같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지?'

그 부정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나면, 둘은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 똥통에서 허우적대게 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 있는 똥통보다 더 지독한 똥통에 빠지면 '감사함', '행복함' 이런 것이 더 멀어진다.

똥통에는 찐한 청록색 똥파리들이 있다. 그것은 내 몸에 달라 붙어, 나를 오염시키려 한다. 손으로 휘져어도 달라 붙는다.

 가만 돌이켜 보건데, 감사할 줄 알던 그때의 똥통이, 감사할 줄 모르는 하루보다 더 깨끗한 것 같다. 천지가 개벽하면 무엇을 하나. 아직도 감정의 똥통에 있다면...

긍정적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주변에 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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