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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28. 2024

[생각]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나'를 알게

 파인애플의 껍질에 육각형 알맹이들이 뾰족 뾰족한 가시를 내보인다. 이 알맹이들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나선 방향으로 얽힌다. 이 나선의 수는 5, 8, 13, 21.

 이런 숫자가 생기는 이유는 그것들이 '피보나치 수열'을 따르기 때문이다.

 피보나치 수열?

피보나치 수열은 기하학, 대수학, 정수론 등의 다양한 수학에서 사용되는 법칙이다. 

해바라기, 솔방울, 나뭇가지, 클로버 잎의 갯수.

이들은 모두 피바노치 수열을 따른다.

피보나치 수열은 아주 간단하다. 앞에 있는 숫자 둘을 더한 숫자가 다음 숫자가 되는 원리다. 1 더하기 1은 2이고, 1더하기 2는 3이며, 2더하기 3은 5다.

1, 1, 2, 3, 5, 8, 13

인간이 자연에서 발견한 대자연의 법칙이다. 이 숫자에 따르면 숫자 4는 없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듯, 세상에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클로버의 잎은 대체로 세 개다. 클로버의 잎이 셋이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네입클로버는 자연으로부터 '척결 대상'이다.

 인간은 거기에 '행운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철저하게 그것을 '청산'하라는 자연의 요구에 따른다. 네입클로버는 인간의 눈에 띄는 순간 반드시 제거된다.

 아름다운 대자연조차, 지긋지긋한 수학으로 풀어버리는 인간의 호기심은 과연 대단하다. 그나저나 이런 자연의 법칙을 먼저 발견한 쪽이 서양쪽이라, 그 이름들이 너무 어렵다. 우리가 먼저 이 법칙을 발견만 했더라도, 법칙의 이름은 더 쉬웠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수학자들이 더 많은 업적을 남겨 '이름'이라도 공부하기 수월하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우리의 본성은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은 우리에게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 내라고 요구한 적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법칙을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왜 그럴까'

 나 역시 인간이기에, 그 현상에도 '왜' 그렇게 되는지 궁금하다. 어쨌건 인간이 가장 궁금해 해왔던 것은 '우주'나 '자연' 뿐만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도 그렇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물에 이름을 짓는다.

돌, 바다, 사람, 나무

그렇게 자연을 알아간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씩 점령해 인지의 영역에 집어 넣던 인간이 당면한 위기는 '감정'에서 시작한다.

 '슬픔', '사랑', '위기'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에도 잡히지 않으며, 그것을 설명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단 한번도 같은 것을 보거나 경험한 적 없는 것.

바로 감정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연필'을 보며 '연필'을 인지하고, '사과'를 보며 '사과'를 인지했다. 고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같은 인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가.

상대가 그것에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는지, 그가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은 어떤 농도와 모양을 하고 있는지 설명이 불가능하다.

설명만 불가하냐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 외부적 기준이 없는 내면에만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은 온통 '추상명사'들 뿐이다.

 '사랑'이란,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스와힐리어 단어'의 뜻을 물었더니, '스와힐리어'로 설명하는 것 마냥, 해설도 온통 주관성 투성이다. 고로 감정을 정의하고 싶어하는 이성과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부딪치며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진다.

 분명 그것은 그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것이라고 정의할 방법이 없다. 고로 우리는 숫자가 아닌, 수많은 언어로 그것을 풀어 헤치며 나름의 정의를 내린다. 그 정이는 내 속을 빠져 나와 밖으로 나가는 순간 기준점 없이 흔들리는 아지랑이 같은 것일 뿐이지만...

 가만보면 사랑이라고 하는 다른 정의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정의가 이것인 것 같다.

"너를 알고 싶어 시작했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사랑은 '상대'와 상관없이 '나'에 관한 일이다. 내가 정의하는 사랑과 상대가 정의하는 사랑은 언제나 다르기에 그저 서로의 그것을 인정하고 나의 것에 충실하되, 상대의 것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결국 '사랑'은 '서로'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각각의 사랑을 각각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 대상을 너와 나로 공유해 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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