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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11. 2024

[역사] 유교는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_생강 국사3

 1388년 고려 정부는 이성계에게 요동을 침공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명을 압박하고 외부적인 위협에 대응하고자 했던 일이다. 다만 이런 선택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이 자신과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 여겼다. 

 고로 그는 본래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대를 돌려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한다. '위화도 회군'이다. 이는 단순히 명령 거부가 아니다. 이성계는 이 참에 권문세족의 세력을 약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려 말기 요동 정벌을 주도한 주체는 '권문세족'이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왕조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의 정치와 군사에 관여하기 사작했고 결국, 요동 지역에 대한 공격이 자신들의 명성과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일부 권력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에 회의감을 가졌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

 이런 배경으로 이성계가 꿈꾼 국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고로 조선은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고위 관료를 직접 선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한 토지 지도와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조선을 더욱 중앙 집권적 국가로 만들었다.

 중앙집권 국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질서'다. 그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고 불교를 탄압한다. 유교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와 잘 어울리는 체제다. 유교의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질서'를 중요시 생각했다.

 군군신신부부자자

 군인은 군인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게..

 유교의 질서는 조선의 통치, 교육, 법률, 사회 질서를 만드는데 중요한 구심점이 됐다.

 불교는 다르다. 불교는 독립적이고 속세와 사회에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불교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는데컸 여기에 큰 폐단도 있었다. 사원과 승려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세금을 면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정한 백성들은 '세금'과 '군역'을 면제 받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줬다. 결국 사회는 불균형을 만들었다. 애초에 불교는 '질서' 보다는 '독립'과 '해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교에는 '삼강오륜'은 유교의 기본 이념 중 하나다. 조선 시대 사회와 국가 질서에는 이 이념이 반드시 필요했다.

 삼강은 무엇일까. 삼강은 '왕과 신하', '아들과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오륜은 무엇인가. 오륜은 '형제', '친구', '남녀', '노인과 젊은이', '주인과 종' 간의 도덕적 원칙을 말한다. 유교가 요구했던 질서는 결국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하고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이다. 이로써 조선은 점차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보수적이고 구조적인' 국가가 되었다.

 삼강오륜은 사회 구성원 간에 정체성을 확고하게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한다. 다시말해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는 서로 권위와 순종을 강조한다. 임금은 권위적이고 신하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아버지는 근엄하고 아들은 아비에게 효를 다해야 하고, 남성은 위엄을 갖고 여성은 거기에 순종하길 고대했다. 이는 현대에 와서 다양한 모순을 만들었지만 당시 조선의 사회질서와 정치는 이로써 빠르게 안정적이게 됐다.

 조선은 유교국가를 만들기 위해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과거제도는 관리 선발을 하는 매우 중요한 시험이다. 이 시험은 유교 경전의 지식을 바탕으로 관료를 선출했다. 이성계가 원했던대로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재를 선정하여 중앙집권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국가 주요 관직을 '유교 사상'에 밝은 인재를 뽑으니, 교육제도도 당연히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성균관'이라는 국립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이 대학에서는 유교 경전과 유학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이들은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또한 향약과 향교를 설립한다. 이는 지역 공동체의 교육 기관으로 주민들에게 유교 경전과 그 원칙을 가르쳤다.

 국가는 유교와 관련된 의례와 행사에 적극 지원했다. 또한 왕실의 주요 행사도 유교적 의례에 따라 진행했다. 이로써 유교적를 모르고서는 이 사회에서 출세를 할수도, 어른 대접을 받을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다. 단순히 교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률 제정'에 있어서도 유교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 제정된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이다. 경국대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유교적 원리와 가치를 반영하여 법률과 제도를 만들었다. 왕의 권위와 신하의 충성, 가족 내의 효도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법으로 정한 것이다. 또한 가족 단위를 '호구제도'로 관리했는데, 이는 '남성' 그리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책임을 부여하고 가족 내에 질서를 만들도록 했다. 혼인과 상속에 있어서도 유교적 가치를 법제화 했다. 혼인 절차나 상속법을 바꾸었다. 또한 장자 상속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이런 의례를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 '여성'의 권한을 축소했다. 이 질서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조선이 500년 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고 현대 우리 사회가 필연적으로 '관계'와 '의무'에 종속되는 사회가 되도록 했다.

 안정적인 사회를 가졌던 농업 국가였던 조선에게는 유교는 꽤 괜찮은 제도였다. 다만 현대 산업사회가 되며 여성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과거 '노인'들의 지식이 '젊은이'에게 무용지물이 되면서 많은 이들이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질서가 깨지는 속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면서 세대 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산업화의 경쟁 구도에서 남성과 여성의 갈등까지 생겼다. 윗 세대가 기대하는 '가정상'과 아랫 세대에서 기대하는 '가정상'의 차이가 발생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기대하는 '결혼관'이 부딪치며 필연적으로 '저출산'이라는 사회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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