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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26. 2024

[생각] 못 가진 것에 대한 욕망으로 가진 것을 망치지


 류승환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에 잊혀지지 않는 대사가 있다.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고 있다고 믿는 게 중요하다."




평가는 나중이다. 일단 진행을 했으면 방향에 확신을 갖고 진행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가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에 태어난 철학자로 '쾌락'을 '최고의 선'이라고 봤다. 이때 '쾌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과 다르다. 극단적 자극이 아니라 정신적 안정과 고통 없는 삶이다. 좌로 크게 튕겨져 그 탄성으로 우로 되돌아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못 가진 것에 대한 욕망으로 가진 것을 망치지 말라."


 망태기는 한없이 채워진다. 채워진 망태기는 뒤로 둘러메어 있으니 욕망이라는 비가시성 덩어리는 어깨를 짓누른다.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지 못하니, 망태기 속 가득한 것들이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다가 모두 부패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장을 보고 나서, 작은 봉투 하나를 얻었다. 봉투는 얼마하지 않은 푼돈이었다. 동전 한닢을 아끼기 위해 식료품을 쑤셔 넣었다.


 '딸기잼', '과일', '주스'와 '각종 소스'


손가락을 쥐여오는 묵직함으로 집을 향했다. 하늘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땅은 축축했다. 콘크리트로 된 바닥에는 나뭇잎과 흙먼지가 쌓여 있었고, 빗물은 그것을 쓸어 거리를 청소했다. 빗물이 쓸어 낸 청소물은 어느곳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봉투가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은 떨어진 딸기잼을 보고 알았다. 잼은 바닥에 부딪쳤다. 잼 쏟아지는 소리를 들은 건 그후 였다. 잼은 빗물에 씻긴 흙먼지와 웅덩이로 향했다. 바람이 불었다. 우산이 뒤집혔다. 나는 비를 맞고 있었다. 찢어진 우산과 구멍난 플라스틱 봉투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길가에 쏟아진 식료품을 맨손으로 치우던 비맞은 외지인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그 비참함과 노동의 가치가 한닢의 봉투값이라는 사실은 배웠다. 행복도 불행도 사실은 모두 그렇다. 한푼 한닢으로도 얼마든지 절망으로 빠져 들고, 행복에 빠질 수 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히 모른다면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사람이 아둔한 지라, 그 확률 게임이 가진 모든 것을 건다.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잘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더 잘하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것을 쏟아버리게 만들지 모른다.




 과한 욕심




더 잘해야겠다는 욕망은 때로 확률과 경우의 수와 닮았다. 그 마법에 속아 몇 번을 다행스럽게 넘어가겠지만,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는 결국 가진 것을 모두 뱉어놓게 만든다. 내가 무언가에 배팅을 하려면 내가 무언가를 내걸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앞서 말했던 '에피쿠로스'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고통없는 삶과 쾌락을 이야기 했던 철학자는 이미 2천년 전에 죽었다. 결국은 '죽음'으로 돌아간 철학자를 비웃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죽음'을 '경험'할 때, 우리는 존재조차 하지 않기에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블랙홀 가장자리에 서 있거나, 태양불을 삼키는 것처럼 그것은 상상과 관념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오지 않는 경험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경험'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굳이 따지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찰'되거나 '상상'될 뿐이다. '관찰'과 '상상'은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식'일 뿐이며 '현상'일 뿐이고 그저 하나의 '지식 조각'일 뿐이다.




 '경험'하지 못한 '미래'도 그렇다.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미리 준비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오지 않으며 그것을 받아드리는 것은 '지금의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존재'다. 존재하지 않는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나'에게 맡겨 버리고, 단순히 '지금'에 충실히 하면 된다.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미루고 또 미루자. 내일이 되면 다시 내일로 미루자. 그리고 그것을 '죽음' 뒤까지 미루자. 존재하지 않는 내일을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게 맡겨버리고 나는 존재하는 것들에 집중하자.




 무엇이 중요한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관념'에 녀석에 속아, '실재'를 내다 버리고 산다. 다만 관념은 관념에게 주고, 실재는 실재나 신경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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