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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27. 2024

[일기] 살면서 그 무엇보다 가장 피해야 하는 사람?

극한 인생 다이어트 중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꽤 고가의 물건을 팔았는데 가슴이 아리다. 아끼는 물건인고 하면 그렇진 않다. 그냥 사놓고 모셔 놓은 물건이다. 구매 할 때, 미친 척하고 샀던 놈이다. 그닥 쓸데도 없으면서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샀던 녀석이다. 녀석에 대한 일화는 이렇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아이'와 '나'에 대한 보상이었으며, 그로 하여금 적절한 보상을 얻었다. 시간이 꽤 지난 물건이라 값어치가 절반이 날아갔다는 사실만큼, 씁쓸한 건, 물건에 어렴풋 묻어 있는 아이의 흔적이다.

 팔까, 말까,

원래 그런 걸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다.

해야 하면 하고, 말아야 하면 마는 사람이다. 어느 날 난데없는 결단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던 성격이다. 그 고지식함이 '유'하게 된 이유는 '풍파'에 정맞은 모난돌처럼 둥글둥글 깎였기 때문일 것이다.

 20대에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렴풋 30대에도 그랬다.

 고것 참 이상하게도, 내가 하면 됐고, 내가 하면 잘했고, 내가 하면 잘됐다.

겸손이라는 걸, 알기 위해서 사람은 아주 크게 한 번 무너져야 한다. 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면 그때서야 알게 된다. 

'내가 떠 있는 강물은 생각보다 깊은 곳이었구나'

 생각보다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저 표면 위에 떠 있을 때는 몰랐던 강물의 깊이가 소름끼치게 두려워지면 감히 나약한 통통배 위에서 객기를 부릴 수 없다.

모를 땐 한없이 용감했던 것이, 알고나니 소름끼치게 무서운 일이다.

 어느 날 거울을 봤더니 깜짝 놀랐다. 

'이게 내가 맞나'

사진을 찍어도 도무지 어디에 쓸 수가 없다.

 흰머리가 보기 싫게 자랐다. 세자리를 찍었던 몸무게는 한참을 치고 올랐다. 단순히 앉았다가 서는데 숨이 차고 '비염', '두통', '불면증'이 일상이 됐다.

 일단 '임시'로 살아가던 삶이라고 생각했던 기간은 점차 길어졌다. 머리는 손질하지 않고 다녔고 옷은 주름지기도 했다. '잠시', '잠깐'이라는 착각에 하루 하루를 그렇게 방치하며 살다보니 그것이 꽤 덩어리진 기간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그런 사람이 됐을까.

분명 그러지 않았는데...

 '몸'과 '마음', '사회적'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어느새 주변인들에게도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냥 '존재' 때문에 '존재'로 이해하는 '존재'. 괜히 그나마 있던 자존심이 0.01g 정도를 지키고 있다가 무너져 내린다.

사람에게는 '터닝포인트'라는 것이 있다. 어떤 존재로 사람이 완전히 그 방향을 선회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감사는 하되, 누군가의 탓을 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누군가를 기점으로 '터닝'하는 순간을 보기는 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지만 꽤 많은 경험을 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으며, 고용주와 고용인을 가리지 않았다. 그 여러 경험과 다사다난한 일상을 돌이켜 보건데 '돈', '지위' 이런 것보다 백 갑절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긍정'으로 '부정적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부유함'으로 타인의 '빈곤함'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감으로 타인의 열등감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근묵자흑' 이라고 먹을 가까이 하면 자신도 물에 든다.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있다고 하던가. 그래서 한줄기 빛이 되면 어둠을 밝혀 줄 수 있다고 하던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하늘에는 수천조 개의 별이 떠 있다는데, 밤하늘은 어째서 깜깜한가.

 결국 모든 것을 품는 어둠에 비견할 때, 빛은 '티끌'이다.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밝음의 품에 어둠은 존재할 데 없으나 어둠의 품에 빛 또한 존재할 데가 없다.

 사람을 사귈 때, 부정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장 멀게 두어야 한다. 거기에 '돈'이 있고 '지위'가 있고 '비전'이 있어도 '부정적인 사람'은 결국, '나'라는 본질을 바꿔 버린다.

 오늘 물건을 파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고돌아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해졌는지... 가만 보면 묻히고 스쳐 갔던 어떤 흔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중일 것이다. '근묵자흑' 나는 '먹' 옆에 있어서 먹이 되었고, 내가 먹이 되니, 주변을 '먹'으로 물들였다. 다시 주변에 '먹'은 나를 물들이고 나는 다시 '더 진한 먹'이 되었다.

 그 악순환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 모든 흔적을 하나씩 갈아 엎는 것이다. 내가 했던 흔적과 관계가 하나 둘 바른 방향으로 정리되어야 하고, 최소 나아가지는 못해도 제자리는 찾아야 한다. 

 꽤 정이 든 물건을 헐값에 팔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손해가 아니다. 이것은 상실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 올 때가 되면 그때는 좀 더 '겸손'해 질 것이고, 좀 더 '신중'해질 것이며, 좀 더 '나' 스러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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