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산소를 만나면 녹이 스는 것 처럼, 인간의 세포도 산소와 만나면 염증이 일어난다. 산소는 세포에 반드시 필요한 원소인 동시에 해로울 수 있다. 이렇게 세포에 '녹'이 슬도록 하는 산소의 반응산물을 활성산소라고 한다.
아무리 아끼고 타도 오래된 자동차는 어딘가 녹이 슬기마련이다. 우리 몸도 그렇다. 관리를 잘하더라도 어딘가에 염증이 발견한다. 자동차에는 평균 3만 5천개의 부품이 사용된다. 인간의 세포는 대략 35조 개이다. 단순 비교가 옳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자동차보다 10억배 이상은 더 복잡하다. 고로 가만히 숨만 쉬며 시간을 보내도 우리의 몸은 쇠퇴한다. 다만 같은 물건이라도 관리에 따라 상태가 달라진다. 가령 어떤 자동차는 꾸준한 기름칠과 관리로 30년이 지나서도 문제가 없는 반면, 어떤 자동차는 10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녹이 슬기도 한다.
자동차를 아끼는 사람은 이를 알고 매일 기름칠하고 닦는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어떤가. 우리몸도 비슷하다. 우리몸을 이루는 35조에서 37조 개의 세포는 자동차보다는 더 복잡하고 염증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공들여 할부금을 갚는 고급 스포츠카보다 태어나면서 당연하게 주어진 '몸뚱이'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오래 전에 받아서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지는 이 몸뚱이를 고급 스포츠카보다 더 아끼고 관리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첫째, 매번 식사할 때, 한입에 30번 씹는 것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한 자료에 따르면 한끼를 먹을 때 씹는 횟수가 13세기에는 2,654회였다. 그러다 20세기초가 되면서는 1420회로 크게 줄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대로 씹지 않고 삼키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습관은 '폭식'을 유발하고 내부 장기들이 과도하게 작동하도록 한다. 오래 사용하는 아이폰 뒷판이 뜨끈해지면 배터리 수명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듯, 우리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도록 내부 장기를 두어서는 안된다. 적게 씹으면 음식물은 덜 분해가 된 상태로 위에 도달한다. 덜 분해가 된 음식을 분해하기 위해, 위장은 더 많은 위산을 분비한다. 더 많은 위산이 분비되면 위벽이 자극을 받아 장기적으로 세포 손상이나 염증이 발생한다. 대체로 '소식'을 하거나 '마른 유형'의 사람을 보면 한 입을 물고 보통 사람보다 오래 씹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오래 씹으면 식사시간이 길어지고 위가 포만감을 느끼는데 걸리는 지연 시간인 20분 이상을 초과하여 더 적게 먹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둘째, 앉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기회가 되면 앉으려는 엉덩이 무거운 현대인들에게 '반이나 남은 물'이라고 한다면 앉을 수록 손해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오래 앉아 있을 수록 손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앉지 못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기는 편이 낫다. 걸을 시간이 현저하게 적은 현대인의 기준에서는 걸을 수 없다면 차라리 서는 편이 낫다. 인간의 근육은 상체에 60%, 하체에 40%가 몰려 있다.
예전에 헬스장 트레이너 선생님께서 다이어트를 하려면 '상체 근육'이 아니라 '하체 근육'을 운동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근육량으로만 비교하면 상체가 더 많은데 왜 하체 근육을 키우라고 했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다. 상체 근육은 밀고 당기는 동작처럼 기능적인 역할을 많이 한다. 고로 기능별로 더 세밀하게 나눠져 있다. 반면 하체의 경우에는 가장 큰 근육 그룹이 있는 부위로 하체 근육이 발달하면 기초대사율이 증가한다. 기초대사율이란 단순히 현상 유지만을 위해 사용되는 '열량'을 말한다. 고로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어도 누군가는 더 많은 열량을 태운다는 의미다. 근육은 같은 부피의 지방에 비해 3배나 더 무겁다. 고로 쉽게 말해 근육은 고무줄, 지방은 솜과 같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과 밑으로 뒤룩뒤룩 삐져나온 솜은 분명 같은 무게임에도 보기에 달라진다. 고로 하체를 평소에 사용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셋째, 혼잣말을 할 때, 자신을 3인칭 시점으로 불러라.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것은 정신건강에 몹시 좋다. 어제 다율이가 하율이에게 '수수께기 문제집'으로 문제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문제는 이랬다.
"내것인데 남이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정답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름'이었다. 이름은 분명 나의 것인데, 가만보면 나는 하루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부를 때, 보통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대명사 나'는 '인환'이라는 고유명사를 대신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언뜻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성의없이 대명사를 쓰곤한다.
'야, 저기 너 앞에 그거 좀 거시기 해봐라.'
이런 대화법에서 상실한 것은 '고유한 정체성'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야, 너, 저기'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부르는 편이 우리를 각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하루 평균 4만에서 7만 번의 혼잣말을 한다. 이 혼잣말에 대부분 '주어'가 생략되거나, '대명사'인 경우가 많다. 특히 동양에서는 '주어'가 자주 생략되곤 하는데, 이는 '집단'을 중요하게 여기던 과거 농경시대의 언어적 습관이기도 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문장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이 문장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고로 모호한 상태와 동작이 안개를 가로 지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글이 영미권으로 번역될 때, 언어의 특성상 부득이하게 임의적 '주어'를 만들어 넣었다. 고로 온전하게 그 문학의 어감이 전달되지 않았다. 참고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3인칭 시점으로 불러 자아의 정체를 살려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쉼.
최근 나의 최대 관심사는 미니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줄이는 것이다. 인맥, 물건을 포함하여 하나씩 줄여나간다. 요즘 학원가에서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스마트폰을 꺼낸다. 쉰다는 개념이 잘못 들어섰다. 쉰다는 개념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한숨을 '쉬다'처럼 숨을 내뱉는 일이다.
다만 현대인들은 대부분은 '쉼'이라는 표현에도 '열정'을 담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SNS를 확인하고 게임을 한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은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에너지를 요한다. 다시말해서 '일하다가 스마트폰을 꺼내는 것'은 일하다가 다시 노는 것이다. 그렇다면 쉼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재밌게 놀더라도 쉼이 있어야 한다. 하루종일 놀다가는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일하다가 다시 놀다가, 다시 일하다가를 반복하는 것은 뇌의 입장에서 '피로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을 이미한다. 피로한 뇌는 더 빠르게 노화되고 기능저하를 겪는다. 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외부 자극과 정보를 줄이고 가만히 눈을 감고 말 그대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것의 최고는 전인류사의 맥락을 보건데 '명상'과 '잠'이 최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