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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ug 17. 2024

[생각] 부정적인 사람을 멀리 해야 하는 이유_서로 영

가만 보면 '만유인력'이나 '양자역학'이나 비슷한 것이 있는데, 영향력이 상호적이라는 것이다. 지구가 사과를 잡아당기면 사과도 지구를 잡아 당긴다. 물체 간에는 서로 작용하는 인력있는데 그 힘은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즉 질량이 크면 힘이 강해지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힘은 강해진다. 질량보다 더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거리'다.

 어떤 것이든 그렇다. 거창하게 수학적 공식을 대입할 것도 없이 우주적 진리가 그렇다. '인과관계'다. 일어날 만하여 일어난 것이고 있음직해서 있을 뿐이다. 일어나는 이유는 그것이 왔음이 아니라 그것이 당겨질만한 거리 내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질량의 차이가 있다면 거기에 끌려갈 것이다.

 사랑과 자애를 설파하던 예수와 부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멀리하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근처에 강한 중력을 가진자가 있다면 최소한 그 근처를 스치고 지나가도 경로가 바뀌게 된다.

 친구, 가족할 것 없이 '부정적인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다. 자칫 자신의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상대를 변화할 수 있을 것이란 자만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예수'는 '유다'를, '부처'는 '데바닷타'를 바꿔 냈어야 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

 먼저 '데바닷타'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불교 역사에서 꽤 중요한 인물로 고타마 싯다르타의 사촌이다. 그는 초기에 싯다르타의 제자로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갔다. 다만, 붓다의 가르침과 승단의 규율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승단의 리더가 되고자 했다. 몇 차례 그는 싯다르타에게 규율에 지도권 양도를 요구했으나, 붓다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부터 그는 꾸준하게 '싯다르타'를 시해하기 위해 시도했다. 붓다에게 돌을 던져 다치게 하려고 했고 코끼리를 풀어 시해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디즈니 만화처럼 상대가 자신을 뉘우치고 붓다에 귀의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붓다는 그에대해 자비로운 마음과 인내심을 가졌으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고 결국 거리를 두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데바닷타는 승단에서 추방됐고, 붓다와는 공식적으로 단절됐다. 물론 붓다는 그에 대해 보복을 하진 않았으나 물리적, 정신적인 거리를 둠으로써 더이상 해로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

 '유다'의 경우는 어떤가. 유다 또한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으로 예수와 가까운 관계였다. 유다는 재정을 맡을 정도로 신뢰를 받는 위치와 거리에 있었다. 다만 그 역시 예수를 배반한다. '붓다'와 '데바닷타'처럼 '예수' 또한 '유다'에 대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유다와 함께 앉아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사랑을 배풀었고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하고 말하며 유다를 곁에 두었다. 유다는 결국 예수를 은냥 30에 배신하였고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위치를 제공했다. 그의 배신으로 예수는 체포된 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져 처형 판결을 받는다. 예수가 유다를 용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떠나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앗다고 할 수는 없다.

 두 성인이 상대에 취한 자세는 비슷하다. 그들에 대해 보복하거나 굴복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되려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두고 용서하기까지 한다. 결론적으로 '붓다'는 상대와 적극적인 격리를 했다. '예수'의 경우는 '상대'를 품었다. 이 둘이 취했던 자세에 대해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가치판단은 하지 않겠으나 분명한 것은 '유다'의 경우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감과 후회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질량'의 크기에 따라 '나'만큼이나 '상대' 또한 변화한다. 즉, 상대를 바꾸고자 한다면 이쪽에서도 비슷한 만큼의 것을 걸어야 가능하다. 영향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힘의 크기는 있으나 거리가 가까우면 반드시 서로 혹은 상대나 자신이 영향을 받는다.

 얼마 전 책에서 보건데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실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달은 언제나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으며 떨어지는 속도가 지구의 곡률에 맞춰지기 때문에 지구로 떨어지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달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계속 끌어당겨지고 있으나 동시에 지구 주변을 공전하면서 원심력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달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상쇄한다는 것이다. 중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반발력은 어떤 거리에서 균형을 이루어 붙잡히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충돌로 이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중력'에 잡혀 그 주변을 공전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지나가는 궤도를 바꾸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중심이 단단히 박힌 큰 질량을 스치는 유성의 경우에는 대기권에서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즉, 예수와 붓다의 두 예시를 보건데 정답은 없다. 공동체에 끼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데바닷타'를 내친 붓다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다를 품었던 예수를 둘다 그들만의 철학에 의해 행동했다. 고로 우리와 같은 범인이 비슷한 상황에 취할 정답 따위는 없다. 붓다와 예수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사람이 주변에 오는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철학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영향력이라는 것을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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