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하는 것은 곶감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박노해 작가의 글에는 '무지'에 관한 내용이 있다. 무지는 '공포'를 부른다. 사람들이 낮보다 밤을, 과거보다 미래를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지의 상자 속에 꽃 한송이도 눈을 가리고 만진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안대를 한 출연자들이 상자 속 무엇에 겁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만지는 것은 맛있는 요리 혹은 생활용품들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그것'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이 '미지'와 '무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어디에 있는가. 공포는 '대상'에 있지 않다. 공포는 '앎'의 '빈공간' 속 '스스로 채운 상상력'이 만들어낸다. 앎의 부재만큼 공포는 자리한다.
어둠에 작은 불을 켜는 행위는 작은 공포를 줄이는 행위다. 책의 한 페이지를 읽거나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작은 공포가 줄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 지나온 길도 확인된다. 어디에 있는지도 보인다.
감은 눈으로 삶을 사는 것보다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다. 장님이 코끼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더 섬세하게 더듬는 행위가 아니라 눈을 뜨는 행위를 해야 한다.
무지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최대한 몸집을 부풀린다. 자신이 재벌3세라던지 숨겨둔 자산이 많다고 허세를 부린다. 이런 허세는 움추려든 무지의 인간을 덥친다. '공포'는 우리를 움추려들게 한다. 무지로 움추려든 몸집은 상대의 지배 대상이 됨을 인정하는 일이다.
GOD의 '촛불하나'의 가사에는 '작은 초'의 예시가 나온다. '작은 초'는 '다른 초'를 찾게 한다. 전체를 한 번에 비출 수는 없어도 당장의 다른 불빛을 찾게 한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전방 몇 미터를 겨우 밝히지만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가며 목적지까지 도달 하도록 한다. 세상을 모두 밝힐 필요는 없다. 지금의 위치에서 전방 얼마정도만 밝히고 살아가면 된다.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손전등만으로 어두운 골목을 모두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손전등이 골목 전체를 밝게 비추기 때문이 아니다. 다음 한 발 앞의 공포만 사라져도 수 천리는 걸어갈 수 있다.
어떤 동물은 위기에 쳐하면 자신의 몸집을 부풀려 상대를 위협한다. 괜히 큰소리로 짖거나 발톱과 송곳니를 드러낸다. 나약한 이들은 상대의 무지를 이용하여 공포심을 자극한다. 다만 어떤 동물은 상대에게 자신의 몸집과 발톱, 송곳니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맹수가 발톱과 호흡소리를 줄이는 이유는 상대에게 완전한 무지를 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미지의 영역에 두고 상대를 '앎'의 영역에 두는 것은 고로 중요하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지를 이용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할 때도 무지를 기대해야 한다. '대상' 자체와 상관없이 '무지'와 '미지'라는 압도적인 규모가 상대를 무너뜨리게 만든다. 나또한 그 규모에 무너져내린다.
'감기에 걸리셨습니다.'와 '무슨 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의 차이는 증세와 상관없이 사람의 운명을 졍한다.
얼마나 알고 모르는가.
그것조차 모른다면 그것이야 말로 완전한 모름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모르는 것을 앎으로 바꾸는 것은 스스로를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꾼다.
스스로 대단한 몸집을 갖기 이전에 공포를 줄이는 '앎'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사람은 과시하고 허세부리지 않아도 겸손과 자신이 저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