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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8시간전

[철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쉽게 이해하기_인식의

 초등학교 때, 한 친구가 해줬던 말이 있다. 자기는 10살이 넘을 때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과 같이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었단다.

 친구의 당시 시력은 마이너스 였다. 꽤 엄청난 근시를 갖고 있는 '친구'에게 모든 세상은 '흐릿'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칸트는 여기서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세상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한 안경'이란 생각의 틀 혹은 규칙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의 '감각기관'의 한계를 확인했다. 즉 우리가 왜곡없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넘어선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했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 따위들이 있다. 가령 당신이 들고 있는 사과와 내가 들고 있는 사과를 합하면 사과가 두 개가 된다는 사실은 '현상'을 바라보고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 현상 없이도 머릿속으로 답이 2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머릿속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성'이라는 도구다.

 즉, 보여지는 진실에 왜곡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이성'이라는 도구에 의지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인식'을 더 명확하게 해주는 '도구'의 성능은 매우 중요하다. 고로 '칸트'는 생각했다. 우리가 '본질'을 바라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성'이라는 도구는 과연 완전한가.

 그렇게 칸트는 '이성'이라는 도구의 효용을 위해, 그 도구를 시험해보기로 한다. 그것이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더 가까울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자, 이제 칸트가 보고자 했던 세계에 대해 더 깊게 알아보자.

 칸트는 세계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봤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세계가 있다. 이것을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에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사과를 예로 들면 사과는 빨갛고 둥글다. 또한 맛있다. 이것이 밖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 즉 현상이다.

 두 번째는 '물자체'다. '물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과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빨간색이라는 것은 사과 표면에 부딪친 광자 중 일부가 특정 파동으로 우리의 시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이는 인지감각이 만들어낸 해석의 결과다. 둥글다는 모양 또한 우리가 공간을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맛도 미뢰 세포가 화학적 전기신호를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그로 이러한 것들은 사과라고 하는 것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사과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같다. 그저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물자체'란 무엇인가. 해석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과가 가진 그 본질 자체를 말한다. 본질은 우리가 느끼고 해석하기 전에 '사과' 그 자체에서 이미 존재한다.

  손으로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 동물의 모양을 만든다고 해보자. 벽에 보이는 그림자는 우리가 보는 '현상'이다. 손의 실제모습이 바로 물자체다. 사과가 빨갛고 맛있고 둥글다는 것은 사과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크게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과 자체가 아니라 사과의 껍데기를 해석한 우리의 감각기관의 해석일 뿐이다. 즉 그것은 사과 본질이 아니다. 고로 우리가 '사과'를 '물자체'로 보기 위해서는 '경험적 이지 않은 '사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고로 '감각기관'을 넘어서 볼 수 있는 '이성'이라는 렌즈가 잘 닦여 있는지 의심을 통해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만 '진실'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양계를 벗어나서 수십 광년이나 떨어진 별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아직 내리지 않은 비를 예측하기도 한다. 즉 경험적으로 혹은 '현상'으로 얻은 정보만 가지고는 우리의 인식 세계를 확장할 수 없다.

 즉 각자 개인은 모두 제3의 현상을 동시에 바라보지면 사실상 '물자체'를 통찰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각자 끼고 있는 안경이 다를 수 있다. 고로 우리가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몹시 중요하다. 그것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로가 모두 다른 안경을 끼고 있고 스스로도 다른 안경을 끼고 있다. 어떤 사람은 연필을 보고 지우개로 보고, 어떤 사람은 연필을 보고 노트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호 착오적인 세계 인식관에서 우리가 '물자체'를 집중한다면 '현상'을 넘어선 본질을 같이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이고 안경의 여부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같은 '세상'을 바라본다는 믿음의 출발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 한 것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경험적 관측'을 통한 발견이 아니다. 실제 당시 학계에서는 '천동설'에 대한 더 많은 귀납적 논리가 있었다. 다양한 관측과 기록이 지구가 아니라 하늘이 돌고 있음을 말했다. 이렇 듯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며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귀납추론'을 내린다. 이는 '현상'을 통한 인식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경험'을 통해 발견한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이성'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연역추론한 결과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이면의 '물자체'를 보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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