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점점 계산적으로 변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다.
어려서 '부모'가 세상의 전부였다가, 젊어서는 '친구'가 세상의 전부였다가, 완숙해지면 '가족'이 세상 전부로 바뀐다.
'결혼'을 기점으로 그런 듯다.
무언가 책임져야 할 어떤 것에 대표가 되면 지극히 '이기적'으로 변한다.
20대 초반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다. 그렇게 몰입해 본 책은 없다. 책은 이틀에 걸쳐 읽었다. 이유는 시작 시점이 저녁이라 그렇다.
'사피엔스'에는 '인지혁명'에 관한 내용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길, '인지혁명'은 우리를 '문명'에 이를 수 있게 도왔다.
'혈연'으로 이루어 집단 생활을 하던 '초기 인류'가 어떻게 '타인'과 함께 공존 할 수 있는 걸까. 그 시작은 인지혁면부터다. 우리가 허구를 믿기 시작하면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공동으로 믿기 시작했다.
'신용'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국가'라는 것도 있다고 믿었다. '결혼'이나 '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런 상상의 매개는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타인을 자신의 '바운더리'에 넣을 수 있게 했다.
종종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원서나 국문으로 본다. 정말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들. 그것들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상상' 혹은 '허구'에 너무 지나친 몰입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위안을 준다.
우리의 문화 중 상당수는 '상대'를 경계하거나 의심하는 방식에서 출발했다. 인사 시, 손을 흔들어 '무기가 없음'을 확인 시켜주거나, 악수를 하면서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사냥을 나간 뒤, 집에 있던 아이와 아내에게 포옹하고 키스하며 몰래 먹은 무언가의 냄새를 확인하곤 했다.
인간의 눈에 타 영장류보다 '흰자위'가 많은 이유 또한 '경계'에서 나온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어딘가를 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진화된 타인을 더 신뢰했다. 그들의 생존 가능성은 이런 인간의 사회화 중 높아졌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눈이 큰 사람'에 대한 선호가 크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만들어낸 '사회'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느껴질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가장 '본능'에 가까운 '신용'은 '혈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적잖다. 배신이라고 대단한 것은 아니다. 작은 손해도 받지 않으려는 그들의 사소한 선택을 목격하게 되거나 정말 중요한 시기에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듯 느껴질 때도 그렇다. 그럴때면 '오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고 '손절'해 버린다.
'그래, 일부 손해보고 사람 하나 덜어내자.'
때로는 그렇게 사람 하나 덜어내는 것이 더 이득일 때가 있다.
그들의 우정도 본디 그리 약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생존'을 위한 집단이 축소된다. 관계에 대한 중요도는 더 급히 줄어든다.
INTJ나 INFJ의 중간쯤 걸쳐진 나의 MBTI가 어떤 경우에는 '인간혐오'에 가까워질 때가 있다. '가까운 배신'일 나이 들며 목격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런 의미에서, 어떤 동물이나 식물의 완전 무해함을 더 신뢰하고 싶어진다.
엄밀히 말하면 앞선 지인들의 그것은 '배신'이 아니다. 모두 '이기적이다'. 그것을 서른 혹은 마흔에 깨닫는 것이 미련할 뿐이다. 관계라는 것 모두 한 번 쓰고 버려도 될 것 처럼 되는 세상과 나이가 되니, 낭만 없어진다.
'악의 완성은 선의 얼굴을 갖는 것이다.'
악이라고 할 순 없지만 선의 얼은 분명 너무 쉽게 속게 된다.
본래 '자아'의 정의 확장의 순서가, '본인, 자녀, 가족, 친구, 동네, 국가...' 순으로 확장할 진데 그게 사실 당연한거지... 하면서 때로는 참 섭섭하고 그렇다.